조선은 삼포왜란 이후 1512년 일본과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왜인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은 호족들이 할거하는 전국시대의 내란기로 국내가 혼란해지자 왜구들이 다시 일어나 왜인과의 충돌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544년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경남 통영시 원량면 진동)에 쳐들어와 인마(人馬)를 약탈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임신약조를 파기하고 왜인 내왕을 금하였다.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국교 재개를 간절히 요청했으며 조정에서는 통교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으로 맞섰다. 문제는 왜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국왕사(國王使)의 통교만을 허용하고 대마도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써 영봉선 무역(迎逢船貿易)이 허용되었다.
영봉선이란 인물재수선(人物載輸船) 또는 인선(人船)이라고도 하며, 본래 우리 나라에 온 국왕 사신이 돌아갈 때 이를 마중하러 오는 선박을 지칭하였다.
그러나 점차 우리 나라에서 국왕사에게 보내는 많은 물화를 한번에 수송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국왕사 파견시에는 으레 몇 척의 영봉선이 동행했고, 그 뒤 영봉선의 증가 요청을 허락해 삼포왜란 전이나 다름없이 무역이 이루어졌다.
다른 한편으로, 백제의 후예라는 대내전(大內殿, 오우치)과 왜구 금지에 공이 많은 소이전(小二殿, 쇼니)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다 하여 부분적으로 무역이 허용되었다.
사량진왜변 이후 표면적으로 중단되었던 대왜 무역은 실제로는 여전히 성행했고, 또 일본국왕사가 계속 내왕하며 중종의 영전에 부의(賻儀)도 올렸다. 그리고 선왕의 대상(大喪)이 지나자 정미약조로 일본인의 내왕·무역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세견선(歲遣船) 25척은 대선 9척, 중선·소선 각 8척으로 하고 각 선의 인원수를 초과하면 유포량(留浦糧)을 반감한다. 수도서인(受圖書人 : 외국인으로 국내 출입을 허용하는 증서를 받은 자)과 수직인(受職人 : 외국인으로서 관직 사령증을 받은 자)의 선척도 이에 준한다.
② 선상집물(船上什物)은 일절 지급하지 않는다. ③ 가덕도 서쪽에 도착하는 자는 적왜(賊倭)로 규정한다. ④ 50년 이전의 수도서인과 수직인은 접대하지 않는다.
⑤ 밤에 여염(閭閻:백성들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횡행하거나 삼소선(三所船)을 타고 여러 섬을 몰래 다니는 자, 칡을 캔다고 산에 올라 돌아다니는 자도 영구히 접대하지 않는다. ⑥ 모든 약속은 진장(鎭將)의 명령에 따를 것이며, 위반 사실이 크면 3년, 가벼우면 2년간 접대하지 않는다는 등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세견선의 선형(船型), 벌칙까지 규정한 것은 종전의 규정에서 볼 수 없는 조항으로서, 이전까지의 왜인의 동향을 참고해 종합적으로 이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미약조의 체결로 일본과의 통교는 재개되었으나 이전처럼 평화로운 통교 무역 관계의 유지는 어려웠다. 그것은 일본 국내의 정국 혼란으로 인해 일본 정부와 왜구라는 이중 관계 때문이었다. 그 뒤 왜구의 침입은 근절하지 못한 채 선조 때까지 계속되다가 일본의 국내 통일과 더불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