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상수(祥叟). 아버지는 충무위부사과(忠武衛副司果) 정양년(鄭陽年)이고, 어머니는 충주 김씨(忠州金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김연(金淵)의 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하던 공부를 포기하고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부장(部將)이 되었다.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 감찰 · 영산현감을 지냈다. 1605년(선조 38) 무안현대장으로 흑산도 앞 바다에 침입한 왜구를 참획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4,000여 명의 의병을 모집, 출신(出身) 김종민(金宗敏)을 중군(中軍)으로 삼고 미곶첨사(彌串僉使) 장사준(張士俊) · 이광립(李光立) 등과 함께 정예병을 양성하며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때 용골산성(龍骨山城)에는 철산(鐵山) · 의주 등지의 피난민이 모여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립된 이 성을 지킬 수 없다 하여 평안도관찰사에게 난민들을 산 속으로 피신하게 하고 전멸의 화를 입지 않게 종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봉수 등이 이 성을 고수할 것을 결의하자 조정에서 그에게 당상계(堂上階)를 주어 전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그는 적에게 투항한 장사준 등을 참수하고 적의 침입에 대처하였다. 용골산성에서 많은 후금군을 살해하고 포로가 된 수천 명의 백성을 구출, 그 공으로 철산부사가 되었다. 이어 가선계(嘉善階)에 올라 용천부사 겸 조방장(龍川府使兼助防將)이 되었다. 곧 방어사(防禦使)와 의주부윤을 겸직하고, 적이 철수한 뒤 구성부사 · 개천군수 · 오위장이 되었다.
1630년 부총관으로 전라좌수사에 특제(特除)되었고, 이듬해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어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계하였다. 이어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가 되었으며, 1634년 전라도병마절도사,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 부총관 겸 훈련도정을 역임하였다. 철산의 충무사(忠武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