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가중(嘉仲), 호는 월봉(月峰). 병조참판 정연(丁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자급(丁子伋)이고, 아버지는 정수강(丁壽岡)이다. 어머니는 지평(持平) 김언신(金彦辛)의 딸이다.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검열이 되었다. 그 뒤 승정원주서를 거쳐 1511년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경연검토관으로서 활약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을 지내고, 1518년 사헌부의 지평·장령을 역임한 뒤 1521년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이듬해에 홍문관 교리·응교를 지내고, 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를 지냈으며, 1525년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올랐다. 그 뒤 좌부승지·병조참지·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533년 도승지가 되었다.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친 뒤 대사간·대사헌에 이르러 국가 기강을 확립하는 데에 힘썼다.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오로지하자, 그에 의부(依附)하기를 꺼려하여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임기가 끝나자 다시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1536년 병조참판으로서 태자진하사(太子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판·이조참판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병조참판을 지내고 1539년 공조판서에 올라 형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을 다시 역임하였다. 이어 우참찬·예조판서·좌참찬을 거쳐 지돈녕부사가 되었다가 1544년 병조판서가 되어 국방 문제를 총괄하였다. 이듬해 명종 즉위와 더불어 형조판서가 되어 소윤에 가담, 대윤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 3등에 책록되고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다.
형조판서로서 전장(典章)에 밝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좌찬성에 올랐다가 죽었다. 기국 도량(器局度量)이 있고, 직무에 과단성을 보였으며, 언행에 책임을 졌고, 권세가들의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 시호는 공안(恭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