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전라남도 함평에 살던 저자가 피난을 가다가 일본군에게 붙잡혀 일본에 건너가서 쓴 일기로, 그 해 8월 12일부터 이듬해 7월 23일까지의 기록이다.
붙잡힌 날은 9월 26일이었는데 같이 피난가던 할머니·어머니·처는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고, 정호인과 동생 호례(好禮), 그리고 족숙 희득(希得)·경득(慶得) 형제만 잡혀갔다. 당시 정호인의 나이는 18세였다. 일본에 잡혀간 그들은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꿋꿋한 기상을 보였으며, 일본인의 문집을 베껴 팔아 겨우 연명하였다.
원본은 한백지(韓白紙) 6절본(길이 23㎝, 너비 21㎝)에 모필 순한문체로 정서·초서가 섞여 있다. 좌우 한단은 여러 장이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일기는 72장이며, 부록으로 일본의 66주(州), 8도(道), 639군(郡), 2도(島)와 아울러 일본 내정(內政)의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이것은 그가 귀국한 지 16년 만인 1613년(광해군 5)에 쓴 것이다. 이 때 같이 잡혀간 족숙들의 기록으로는 희득의 『해상록(海上錄)』, 경득의 『만사록(萬死錄)』이 전해오며, 아우 호례의 일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세 책의 일기는 다른 부분도 없지 않으나 같은 장소에서 생활한 기록이기 때문에 대동소이하며 날짜도 비슷하다.
이 밖에도 다른 일기들이 남아 있으나, 이 책은 그 초고가 남아 있으며 내용도 자세해 정유재란의 사료로서뿐만 아니라 다른 일기에 대한 저본(底本)이 되기도 한다. 피난 당시 자결한 할머니 등과 희득 형제, 호인 형제를 위해 팔렬정각(八烈旌閣)이 함평군 월야면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