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영오(英五)·후윤(厚允). 호는 노백헌(老柏軒)·애산(艾山). 정방훈(鄭邦勳)의 아들이다. 1864년(고종 1) 경상도 합천에서 전라남도 장성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학문에 몰입하였는데, 이러한 생활은 1879년에 스승이 죽기까지 15년간 계속되었다.
당시는 국권이 서서히 일제의 손에 넘어가는 시기였던 만큼, 벼슬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저술과 후진 양성에 진력하였다. 1860년 김홍집(金弘集)이 청나라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정부에 제출하고 개화를 주장하자, 이에 대하여 조선은 아직 약한 상태이므로 일시적인 고식책에 불과하다 하여 척사위정론을 주장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의 개혁에 거의통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호남·영남에 포고문을 내어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여 일본과 담판하기를 촉구하는 한편, 노성(魯城: 지금의 논산) 궐리사(闕里祠)에서 최익현(崔益鉉)과 거의하기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강점 후 일제가 저명인사에게 주는 은사금을 물리쳤다. 1911년 오랑캐의 침략이 서서히 이루어져 빠져 들어가면서도 깨닫지 못하니 삼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학문적으로는 1903년「납량사의기의변(納凉私議記疑辨)」·「외필변변(猥筆辨辨)」 등을 지어 전우(田愚)의 기정진에 대한 반박을 변론하여 철학사적으로 중요한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제자로는 정면규(鄭冕圭)·권운환(權雲煥) 등이 있으며, 합천경덕사(景德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 『노백헌집(老柏軒集)』 49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