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 손이며, 정유길(鄭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이고, 아버지는 형조판서 정광성(鄭廣成)이다. 어머니는 황근중(黃謹中)의 딸이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동생이며, 좌의정 정지화(鄭知和)의 4촌이 된다.
오위장 남정(南瀞)의 딸 의령 남씨(宜寧南氏)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얻지 못해, 형 태화의 막내아들 정재륜(鄭載崙)을 입양했는데, 이가 효종의 딸 숙정공주(淑靜公主)의 남편인 동평위(東平尉)가 되어, 효종과 사돈 관계가 되었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여러 문한(文翰)의 관직을 거쳤다. 1635년부터 1642년까지 동래부사가 되어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주로 3사의 여러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638년 충청도암행어사로, 이듬해는 함경도암행어사로, 1641년 황해도암행어사로 각 도정(道政)을 염찰(廉察)하였다. 1640년에는 세자시강원보덕이 되어 심양(瀋陽)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기도 하였다. 이 때 세자가 서양 문물을 완호(玩好)하는 것을 크게 북돋운 것으로 전한다.
1645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어난 소위 강옥(姜獄: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에게 죽음을 내린 사건) 때 패초(牌招)를 올리지 않은 죄목으로 파직되었다. 그리하여 1년 반 동안 폐고(廢錮)되어 있다가 1647년 말에 평안도관찰사로 승진, 기용되었다.
평양에 부임한 지 1년 반 만에 아버지의 병으로 잠시 사직했다가, 1650년(효종 1)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 뒤이어 경기도관찰사·도승지·강화부유수를 거쳐 1657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1667년(현종 8) 우의정이 되기까지 10년 동안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두루 역임하면서, 1660년과 1664년 동지사(冬至使)로 두 차례나 중국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정책 대결이 표면화되었던 때여서 중도적 노선을 지키고자 했던 그와 그의 일문(一門)에게는 적지 않은 시련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10년 동안에 무려 5차례나 벼슬에서 물러나는 곤욕을 겪다가, 형 정태화가 영의정을 내놓고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으면서 우의정 겸 의금부판사가 되었다.
우의정에 오른 이듬해 송시열(宋時烈)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 좌의정에 올랐지만, 곧 형 정태화가 영의정으로 복귀함에 따라 중추부판사로 물러났다. 1677년 9월 중추부영사로서 죽었다.
삼공(三公)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이 축출되는 사태가 빚어졌지만, 중도적 노선을 견지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