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이천도호부사, 대호군, 성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경서(景舒)
만죽헌(萬竹軒), 내욕거사(耐辱居士)
이칭
세한당(歲寒堂), 소요산인(逍遙山人)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26년(중종 21)
사망 연도
미상
주요 관직
대호군|성천도호부사
정의
조선 전기에, 이천도호부사, 대호군, 성천도호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온양(溫陽), 자는 경서(景舒), 호는 만죽헌(萬竹軒)·세한당(歲寒堂)·소요산인(逍遙山人)·내욕거사(耐辱居士). 아버지는 우의정 정순붕(鄭順朋)이며, 어머니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인 봉양부정(鳳陽副正) 이종남(李終南)의 딸이다. 둘째아버지 정백붕(鄭百朋)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45년 명종이 즉위한 뒤 그의 아버지가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의복을 변장하고 노비들 틈에 끼어 윤임(尹任)·유관(柳灌) 등 대윤일파의 사정을 탐지, 제공하는 등 대윤을 제거하는 데 적극 협력한 공으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사재감직장(司宰監直長)에 제수되었다.

이어 주부로 승진, 1550년(명종 5) 중부주부(中部主簿)를 거쳐 사옹원판관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가 되어 정업원(淨業院)의 토목공사를 상소하여 중지시켰다. 155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는 충훈부경력(忠勳府經歷)으로 승진하여 군적(軍籍)을 철폐할 것을 상소하였다.

1560년 왕의 특지로 이천도호부사가 되고 이어 대호군으로 전임하였는데, 이 때 조정의 공론이 윤원형(尹元衡)의 관작삭탈을 주장하자 이를 변호하였으나 채납되지 않았다. 이어 성천도호부사로 나갔다가 사직하고, 양주 소요산에 은거하였다.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서법이 매우 기이하였으며, 정백붕의 비갈(碑碣), 충훈부의 편액, 해주 부용당(芙蓉堂)의 현판 등이 그의 글씨로 알려지고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유고』가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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