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동면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동면
건축
유적
문화재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정혜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특수형 석조 불탑. 국보.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정혜사터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특수형 석조 불탑. 국보.
개설

안강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0㎞ 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지나 옥산리의 독락당(獨樂堂)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 우뚝 서 있다. 정혜사지 일대의 경작지에는 기왓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데 과거 정혜사의 중심을 이루었던 사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13층석탑은 각 부의 양식과 조성수법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특이한 유례를 보이고 있어 크게 주목된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이 석탑은 1922년경 일본인들에 의하여 수리된 것이라 하는데 보수공사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다만 탑신부 위층의 3층이 떨어져 있던 것을 제자리에 올려놓았으며 기단을 시멘트로 굳혀 놓았다는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단부를 시멘트로 고착시킨 것도 그 뒤 파손되어서 큼직한 잡석으로 기단을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내용

높이 5.9m인 이 석탑은 전체 부재를 화강암으로 조성하였다. 기단은 단층 토축(土築)으로서 예스런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이것이 과연 어느 정도로 원상을 갖추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토대(土臺)의 상면 중앙에는 1단의 석축이 마련되고 그 위에 4매석으로 구성된 높직한 2단의 방형 굄이 설치되었으며 그 위에 13층의 탑신을 받고 있는데, 이 2단의 굄돌은 곧 기단부 갑석 상면의 굄대 수법으로서 현재는 지대석과도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즉, 이 받침석은 4매의 판석(板石)을 네 귀에 1매씩 놓아 결구하였으므로 신라석탑의 기단부 갑석의 조성수법과 동일한데, 높고 낮은 2단의 각형받침을 조출(彫出)한 것은 상층기단 갑석 위에 놓아 그 위에 탑신부를 받는 받침대로 마련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현재는 이 석탑에 기단부가 없으니 이 2단의 받침석이 지대석 또는 탑신굄석의 구실을 하고 있다.

탑신은 13층의 탑신석(塔身石)과 옥개석(屋蓋石)으로 건립되었는데, 특히 초층의 탑신과 옥개가 큰 규모로 조성되고 그 위의 2층부터는 아주 작아져서 2층 이상이 부가물(附加物) 같은 감을 주고 있음이 특징적이다.

초층탑신은 네 귀에 큼직한 방형의 석주를 우주(隅柱: 모서리기둥)로 세우고 그 안에 양측으로 우주에 붙여서 역시 1석씩으로 된 작은 방주(方柱)를 세웠으며 그 위에 인방(引枋), 아래에 하방(下枋)을 걸쳤는데, 그 사이의 공간은 내부가 막혀 있고 이러한 시설은 4면에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설치되어 있다.

초층옥개석은 옥석(屋石)과 그 하면의 받침 부재가 별석(別石)으로 구성되었는데 옥석은 8석, 받침부는 4매의 층급(層級)받침으로 결구되었다. 받침은 3단이며 통식(通式)인 각형으로 규모가 큰 옥개석을 따라서 자연히 큼직하게 마련되었으며, 옥개석 하면에는 낙수홈[落水溝]이 없다.

처마는 신라석탑의 특징을 따라 직선을 이루었으며 네 귀의 전각(轉角)에 경쾌한 반전이 있고, 낙수면(落水面)은 평박하며 4 우동(隅棟: 옥개석의 귀마루)에는 합각머리[合閣頂: 합각 박공이 용마루에서 서로 맞닿는 부분]가 예리하게 표현되었다.

초층옥개석 위에는 1매의 판석으로 된 1단의 굄돌을 놓아 그 위로 2층 이상의 탑신을 받고 있는데, 이 굄 판석은 곧 거대한 초층부와 구별하려는 의도인 것 같으며, 이것으로써 상부와 하부의 연결이 더욱 짜임새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2층 이상의 탑신은 각 탑신과 옥개석이 급격히 위축되어서 마치 초층부에 부가된 상륜부(相輪部)같이 보인다. 이들은 각층의 탑신·옥개가 1석으로 조성되었는바, 각 탑신은 더욱 낮고 작아 옥개석 정면(頂面)에 마련한 탑신받침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각 층 옥개석 하면의 받침은 3단씩으로 초층의 받침수와 같고 옥개석 각 부의 양식도 동일하여 하면에는 낙수홈이 없고, 처마는 직선으로서 평박한 낙수면과 네 귀 전각의 반전 등과도 잘 조화되어 전체적으로 경쾌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상륜부는 현재 노반[露盤: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앙화·상륜 등을 받치는 장식] 1석이 남아 있을 뿐인데 그 모양은 일반적인 형식이다.

특징

이 석탑은 탑신의 층위(層位)에 있어 보기 드문 13층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초층에 비하여 2층 이상의 탑신부가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줄어든 점 등이 특이하다. 그리고 초층탑신 4면에 감형(龕形)을 개설한 것과 아울러 기단부의 축조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각 부 양식과 조성수법을 검토하여 그 건조연대를 추정해보면, 우선 초층부는 목조탑파(木造塔婆)를 모방한 듯한 예스런 세부(細部)를 지니고 있는 점도 엿보이나, 각 옥개석 하면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약화(略化)된 것은 역시 시대가 뒤로 내려옴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현재 옛 절터의 원위치에 원형을 잘 간직한 채 보존되어 있는 이 석탑은 13층이라는 층수와 더불어 기단부와 초층탑신의 양식, 탑신과 옥개석이 한 개의 돌로 조성되는 등 통일신라의 독특한 양식을 보이는 특수형 석탑이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국보 1(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집필자
정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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