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방로(邦老), 호는 수남방옹(水南放翁). 경주 계림인으로 고려 때 대제학을 지낸 정현영(鄭玄英)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효성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능참봉 정금암(鄭金嚴)이고 어머니는 옥천(玉川) 조영(趙瑛)의 딸이다.
전형적 양반 집안에 태어났으나 관직에 나간 바 없이 남원 동문 밖에서 초야에 묻혀 살면서 77세의 일생을 보냈다.
형이 어려서 죽은 탓으로 부모들이 혹시라도 몸이 상할까 걱정하여 공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에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인조반정·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비록 정계에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시대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강직하고 정의를 제일로 내세우던 적극적인 성품으로 불의를 두고보지 못했던 까닭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61세의 노구(老軀)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아 출전했다. 정묘·병자의 두 차례의 호란 때에는 늙고 쇠하여져 전장에 나가지 못하자 아들을 대신 출정시켰다.
불의를 보지 못하고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의식은 그의 가사작품 「성주중흥가(聖主中興歌)」와 시조작품 일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계해반정후계공신가(癸亥反正後戒功臣歌)」·「탄오성한음완평찬적가(歎鰲城漢陰完平竄謫歌)」·「탄강도함몰대가출성가(歎江都陷沒大駕出城歌)」·「탄북인작변가(歎北人作變歌)」·「민여임청백찬가(閔汝任淸白讚歌)」 등도 모두 다 그런 의식을 표현한 시조작품이다.
한편,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대신 생활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찾아다니며 그 심회를 시가로 표현하기도 했다. 「수남방옹가(水南放翁歌)」·「용추유영가(龍湫遊詠歌)」 등의 가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상을 작품화한 시가로는 「탄궁가(嘆窮歌)」·「우활가(迂濶歌)」 등의 가사작품과 「자경(自警)」·「기우인(寄友人)」·「곡처(哭妻)」 등의 시조가 있다.
그의 시가작품은 시어 선택과 배치 면에서 독창적이다. 더불어 섬세한 예술적 관찰력과 대담한 의식 노출은 개성 있는 시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시가작품의 군데군데에 보이는 고발 부분들은 당시 여타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글작품으로 가사 5편과 시조 20편이 있고, 한시문도 30여 편이 있다. 문집으로 『수남방옹유고(水南放翁遺稿)』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