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1책. 목활자본. 1863년(철종 14) 박성묵(朴星默)이 처음 간행하였고, 1897년 후손 정만(廷蔓)이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휘재(李彙載)·이종상(李鍾祥)의 서문이 있으며, 권말에 박태덕(朴太德)·박성묵·정만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도서관, 전남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1에 시 16수, 서(書) 2편, 문(文) 7편, 권2·3에 부록으로 일기 1편, 잡저 1편, 시 2수, 만사 2수, 실기 1편, 서(序) 2편, 행장·묘갈명·유장(儒狀) 각 1편, 포계(褒啓) 등 9편, 상우재실적(尙友齋實蹟) 1편, 후서 2편, 묘표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문 중 「맹약문(盟約文)」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과 대치하면서 의사들의 용기를 북돋우고 나라를 위하여 함께 죽기를 맹서한 충절이 넘치는 글이다.
「격문(檄文)」은 임진왜란 때 나라가 적에게 유린되고 임금은 북으로 피난을 가자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백성이라 하고, 어려울 때 비겁하게 도망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싸워서 공을 세울 것을 촉구한 내용이다.
잡저는 이기옥(李璣玉)·김우옹(金宇顒) 등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그의 공적을 드러내어 밝히고 포전을 내리기를 요청한 글이며, 「창의시일기(倡義時日記)」는 창의 당시에 장서기(掌書記)의 임무를 맡았던 김후생(金後生)이 기록한 일기로서, 1592년 왜적이 대거 침입하자 박경전이 의병을 모집하고 스스로 대장이 된 전말과 당시 공암진(孔巖陣)에서 군기를 제조하고 의병과 군량을 모은 사실, 정유재란 때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곽재우(郭再祐)와 결사고수를 맹세하고 정병 5,000으로 울산에서 전공을 세운 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