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은 남한강 상류의 침식측면에 만들어진 충적토 위에 있다.
1962년국립중앙박물관이 두 차례에 걸쳐 18기의 고인돌[支石墓]을 발굴해 그 성격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1982년과 1983년에 충주댐 수몰지구 유적발굴조사로 토기층과 무늬[有文]토기층ㆍ선돌ㆍ고인돌ㆍ삼국시대무덤 등이 있는 복합유적임이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층에서는 민무늬토기시대의 전형적인 유물과 같이 굼토기ㆍ덧띠무늬토기ㆍ민무늬토기 등이 나왔다. 이들은 바라진 입술 옆모양, 그릇 밑모양 등으로 보면 전형적인 민무늬토기이나, 비짐으로 보면 모래알의 굵기가 가는 것부터 굵은 것까지 고루 포함되어 있다.
덧띠무늬토기는 민무늬토기층의 가장 아랫부분에서 나왔다. 모래비짐의 크기가 다른 민무늬토기에 비해 조금 작으며, 함경북도 서포항이나 회령ㆍ오동, 압록강유역의 심귀리ㆍ공귀리ㆍ신암리에서 나오는 덧띠토기와 비교할 수 있다.
무늬토기층에서 나온 토기무늬는 암사동토기계통의 점선열문이 많고, 그 밖에 사단선문(斜短線文)이나 생선뼈무늬도 있다. 베푼 방법이 매우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이 층위로 발굴되었다.
2기의 선돌은 모두 남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제1호 선돌(크기 80㎝×80㎝×25㎝)은 윗면이 편편해 외형적인 특징으로 보아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제2호 선돌(크기 139㎝×65㎝×28㎝)은 끝이 뽀족해 남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제1호 선돌은 얼굴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려한 점이 주목된다.
선돌 옆에는 표력만한 크기의 돌들이 편편한 면을 위로 향하게 해 11개가 타원형을 이루면서 놓여 있었다. 선돌과 둘레돌들로 보아 매가리트성소(聖所)와 연관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제1ㆍ2호 선돌 옆에서는 거꾸로 엎어놓은 백제토기의 두드림무늬[打印文]가 있는 단지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은 큰돌숭배의 한 행위표현으로 해석된다.
고인돌은 남한강 상류에 만들어진 낮은 충적대지 위의 강가에 약 1,300m의 범위로 46기가 두 줄로 분포되어 있었다. 1962년국립중앙박물관에서 18기를 발굴하였고, 1982년과 1983년에 충북대학교에서 8기를 발굴하였다.
고인돌의 발굴시 나타난 홈[有溝]은 독특해 충6호(‘충’이란 충북대학교의 머리글자)의 홈은 시체매장부의 주위에 일정한 사이를 두고 보호벽을 세웠다. 이것이 곧 굄돌의 구실을 같이하고 있었다.
충13ㆍ17호는 홈의 긴 벽인 남북벽에 각각 1장의 판석을 세우지 않고 뉘어놓아 홈을 보다 견고하게 구축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시대적인 변화, 지역적인 특징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예가 없는 독특한 것이다.
1962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한 13호 고인돌에서는 남자의 완전한 뼈가 출토되어 당시 사회의 매장풍습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관심을 끌었다. 또한 연대가 2,450B.P.로 나타나 고인돌문화의 연대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세웠다.
또한 충북대학교에서 발굴한 충6ㆍ7ㆍ13ㆍ17호 고인돌에서도 사람뼈가 출토되었다. 이 중 묻기ㆍ성별ㆍ나이 등을 알 수 있는 것은 충6ㆍ7ㆍ17호이며, 충13호에서는 3점의 조각으로 나왔다.
한편, 유구와 묻힌 사람의 머리방향은 사람뼈가 출토됨으로써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머리가 모두 동쪽으로 있었으며, 또한 강물의 상류쪽으로 두어 물의 흐름방향과 일치하고 있었다. 고인돌이 강가에 있는 경우 강물의 흐름과 나란히 방향을 하고 있으며, 유구의 방향도 강물이 흐르는 방향과 일치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부장품으로는 소뼈ㆍ사슴뼈ㆍ돼지뼈ㆍ달팽이가 출토되어 붉은 흙과 함께 당시 사회의 장례의식과 복원에 관한 문제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붉은간토기와 함께 둥근밑ㆍ편평밑ㆍ긴목항아리ㆍ대접ㆍ보시기 등 다양한 형식의 민무늬토기가 출토되었고, 둥근밑과 편평밑을 가진 토기가 고인돌 유적에서 함께 출토된 것이 특징이다.
목항아리는 높이가 27㎝로 지금까지 고인돌 유적에서 이처럼 큰 붉은간토기가 출토된 예는 없었다. 따라서 황석리 고인돌문화는 붉은간토기가 특히 발달된 문화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인돌 유적에서는 사람뼈와 함께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성별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남자무덤에서는 돌칼ㆍ돌도끼, 여자무덤에서는 장식품(특히 충7호에서는 목걸이)이 부장되어 있었다. 동물뼈는 남녀공동으로 부장되어 있었다.
황석리 들판의 민무늬토기 사람들이 살았던 약간 높은 대지 위에서 연도와 함께 주실인 현실에서 2개의 무덤자리가 발견되었다. 여기에 묻힌 사람은 50대 초반의 남자와 60대 이상의 여자이며, 무덤은 토기와 무덤형식으로 보아 3, 4세기경 백제계통으로 밝혀졌다. 출토유물로는 청동으로 된 3점의 허리띠 장식품이 나왔다.
또한 돌덧널무덤 옆에는 판돌을 세워서 만든 어린아이의 무덤이 있었다. 이[齒]나 머리뼈의 이음새로 보아 9, 10세 정도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목걸이와 곱은 옥이 출토되어서 당시의 장례습속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유적의 전체 문화성격은 신석기시대에서부터 백제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며 발달한 각기 다른 유구를 가지고 있으며, 특히 무덤이 많이 발달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