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자장(自章), 호는 성강(星江). 아버지는 목사 박(璞)이다. 총명한 데다가 학문에 힘써 능히 제자백가의 학문에 널리 통하여 문사(文詞)로 사우(士友)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다.
1639년 사마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지만 대과에는 누차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충원(忠原)의 벌판에서 거처할만한 곳을 정하고, 글과 역사를 자기의 업으로 삼아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덕행을 우선으로 하고 문예를 뒤로 하였으며, 당시의 명류(名流)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출입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학도예부(學徒禮部)에 추천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제수받았다.
그 뒤 여러 곳의 관직을 역임하다가 금구현령에 이르렀는데 이를 싫어하는 자들이 해치는 바가 있자,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왔다. 성품이 조용하고 과묵하였으며, 또한 친구들과 교유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한편, 일찍부터 존귀하고 현달한 가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도 백성들에게 위엄으로 몸소 기율을 지켰고 자혜로 다스려 명성과 업적이 널리 퍼졌다. 문장은 예스러운 아담함을 좋아하였고 시는 더욱 깊은 조예를 가졌는데, 두보(杜甫)의 시에 전념하여 이를 모범으로 삼았다.
저술은 거의 산일(散佚)되었고 유고(遺稿) 약간이 가장(家藏)되었으며, 『기년통고(紀年通攷)』에 12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