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식 ()

조동식
조동식
인물
해방 이후 동덕학원 이사장, 성균관대학 초대 이사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춘강(春江), 林川東植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7년(고종 24) 8월 26일
사망 연도
1969년 12월 25일
본관
임천(林川)
출생지
서울
정의
해방 이후 동덕학원 이사장, 성균관대학 초대 이사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188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전사관(典祀官) 한우(漢佑)의 아들이다. 1907년 3월 관립 한성한어학교, 1910년 1월 사립 기호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1908년 4월 동원여자의숙(東媛女子義塾)을 설립했다. 같은 해 6월에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조직해 사립기호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도 학생으로 입학해 자기완성에 힘썼다. 당시 동원여자의숙의 학생은 모두 11명이었으며, 학비는 전액 무료로 해서 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국권회복을 꾀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었다.

1909년 4월에는 동덕여자의숙과 병합하여 동덕여자의숙으로 새출발했으며, 그 뒤 생애를 마칠 때까지 동덕학원 건설에 헌신했다. 1912년에는 동덕여학교의 교장에 취임했는데, 심한 재정난으로 곤란에 처했을 때 손병희 · 이상재 · 이석구 등의 적극적인 협찬으로 교세를 바로잡아 발전했다.

1942년 3월 동덕고등여학교 교장으로서 「매일신보」 에 징병제도의 실시에 부응하여 조선의 여성들에게 ‘군국의 어머니’가 될 것을 역설하는 기고문을 발표하는 등 전쟁협력을 위한 여성의 의무를 강조하고 여학생 교육을 주장했다. 또한 내선일체와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총후생활을 주장하는 기고문을 게재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50년 5월에는 동덕여자대학을 설립하여 학장에 취임했으며, 그 뒤 동덕학원 이사장으로 재임했다. 이 밖에도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참여,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고, 상명여자대학 · 한성여자대학 · 덕성여자대학 · 성신여자대학 등의 이사로 활약했다.

그 뒤 대한교육연합회 회장을 비롯하여 문교재단연합회장, 중앙교육위원회 의장, 대한문교서적주식회사 사장, 한국인쇄주식회사 주1 회장, 중앙학원 감사, 교육특별심의회 위원, 중앙교육연구소 운영위원장, 전국사립중등학교연합회 회장, 국립서울대학교평의회 부회장 등 수많은 요직을 맡아 우리나라 교육계의 발전을 위하여 크게 공헌했다. 1969년 12월 25일 사망했다.

조동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17∼74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9년 11월 제1회 영신(永信)아카데미 교육본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를 받았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6: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춘강(春江) 조동식선생(趙東植先生) 전기(傳記)』(춘강조동식선생 기념사업회, 1979)
『춘강(春江) 조동식선생(趙東植先生) 고희기(古稀記)』(동진회, 1956)
주석
주1

예전에, 주식회사의 이사(理事)를 이르던 말.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성주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