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육로통상조약은 1888년(고종 25) 8월 20일에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양국간의 통상에 관한 조약이다. ‘두만강 국경지역의 통상에 관한 규정’이라고도 한다. 1884년에 미국인 외교고문 데니의 주선으로 조선과 러시아는 조로육로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 1885년 조선에 부임한 러시아의 베베르대리공사는 통상장정체결을 제시하였다. 조선은 데니를 협상에 참여시켰으며 러시아의 이익의 한계를 반영하는 통상교섭에 최종적으로 합의하였다. 양국간의 통상교섭은 군사적·정치적 타협은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상업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
조선측 대표 조병식(趙秉式) 및 데니(Denny, O. N.)와 러시아측 대표 베베르(Weber, C.)가 체결, 조로육로통상장정(朝露陸路通商章程)을 채택하였다.
1884년에 제1차 조로밀약기도가 실패하고 나서 청나라의 이홍장(李鴻章)은 이 사건의 주모자인 묄렌도르프(Mollendorff, P. G.)를 해임하고 당시 청국해관총세무사인 영국인 하트(Hart, R.)의 권고에 따라 조선정부의 외교고문에 미국인 데니를 임명하였다.
데니의 임명을 계기로 조선정부는 미국의 세력을 끌어들여 조로밀약사건 및 거문도사건 등으로 고조된 청 · 일본 · 영국 · 러시아 사이에 얽힌 긴장관계를 완화하려 하였다.
청의 주선으로 조선에 온 데니는 고종으로부터 내무부사 외아문장교사당상(內務府事外衙門掌交司堂上)의 직위를 받고 고종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데니는 점차 청의 주찰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조선간섭정책에 반발하고, 이를 저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친로반청정책의 입장에서 조선이 진정한 독립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있어야 된다는 가정 하에 서구국가들과의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에 체결된 대표적인 조약이 바로 조로육로통상장정이었다.
데니는 이 조약의 교섭과정에서 조선측을 대표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조병식과 함께 조약문에 서명하였다. 그런데 이 조약은 조로간의 교역을 체계적으로 규정했다는 점에서 뿐만아니라 1880년대 후반에 러시아의 조선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1885년 가을, 조선에 온 러시아의 베베르 대리공사는 부임 직후 조선과 러시아간에 통상장정체결을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특히 두만강 지역에 러시아의 교역기지를 건설할 것, 양국인들이 자유롭게 교역할 수 있도록 국경선으로부터 100리의 자유무역지역을 설정할 것, 그리고 러시아인에게 특권이 부여된 개항장으로서 평양을 개항할 것 등의 조건을 조선정부에 제시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당시 거문도사건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간의 대립이 미해결 상태에 있고, 청 · 일본 · 영국 3국이 러시아가 조선과의 통상을 조선의 북부지역에 대한 진출 및 지배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베르 공사의 제의를 수락하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조선측은 서울 주재 미국대리공사 퍼크(Foulk, G. C.)의 권고에 따라 베베르공사 제의를 보류하고 적절한 타협에 도달하기 위해 외교고문인 데니를 협상에 참여시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 데니는 톈진(天津)에서 머무르며 영국의 거문도 점령 및 제2차 조로밀약사건과 관련된 위안스카이의 행동에 관해 이홍장과 회담하고 있었다.
이에 퍼크 대리공사는 러시아와의 교섭을 시작함에 있어 데니의 참석이 필수불가결인만큼 그가 귀환할 때까지 교섭을 연기시킬 것을 조선정부에 권고하였다. 1886년 10월 데니의 귀국과 더불어 통상교섭은 개시되었다. 특히 데니와 베베르 공사 간의 친분관계는 교섭진전에 촉진제가 되었다.
그러나 통상조약체결교섭은 제2차 조로밀약사건과 거문도사건이 아직 미해결 상태여서 청나라와 영국간에 의혹이 남아 있기 때문에 데니가 예상한 것처럼 쉽게 진척될 수 없었다.
1886년 10월 이홍장-라디젠스키(Ladygensky)협정으로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했지만 러시아의 대조선정책이 매우 신중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정부는 1888년 5월 8일 페테르스부르크의 특별위원회에서 아무르총독 코르프(Korf)와 외무성아시아국장 지노비에프(Zinovief)의 주장을 채택하였다.
즉 러시아의 조선 점령은 경제적 · 전략적 측면에서 불필요하며 또 영국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가 기존 전통관계에 한정된다면 구태여 청나라의 종주권 행사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대조선정책을 채택하면서 조선 접근책이 모색되었다.
이에 따라 8월 중순에 베베르공사와 데니는 조선에 있어서 러시아의 이익의 한계를 반영하는 통상교섭에 최종적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양국간의 통상교섭은 군사적 · 정치적 타협은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상업적인 것에 한정되어 있다.
‘두만강 국경지역의 통상에 관한 규정’이라고 명명된 이 조약에서 양국간에 합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대체로 러시아는 평양보다는 경흥을 개항하겠다는 조선정부의 제의에 응하되 그 대신 조선정부는 러시아인들이 경흥에서부터 100리 거리 내에 통행권없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도록 상업상의 특권을 허락하였다.
이 밖에도 상품의 밀수방지에 관한 규정, 무세품목(無稅品目) · 금수품목(禁輸品目) 및 관세 등에 관한 규정 등을 다루었다. 더불어 조약 내에는 경흥에서의 부영사관 설립, 치외법권, 조차권, 종교의 자유 등에 관한 일반적인 규제조치가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항을 토대로 마침내 1888년 8월 20일에 러시아를 대표한 베베르공사와 조선정부를 대표한 조병식과 데니간에 정식으로 조로육로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