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

대학 졸업식
대학 졸업식
제도
규정된 교과나 학업을 마치는 것.
정의
규정된 교과나 학업을 마치는 것.
개설

학생이 각급 학교에서 요청하는 교육을 모두 끝내고 학교를 떠나가는 것으로, 정규 학교뿐만 아니라 이에 준하는 각종 교육기관에서도 졸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학생이 학교에 입학한 뒤 여러 가지 학습활동에 참가하고 학습능력이 신장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각종 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등, 학칙이 규정한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입학 후 학교에는 다녔으나, 교육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지 않고 중도에서 끝마치는 경우를 흔히 수료라 한다. 졸업은 「교육법」과 「교육법시행령」 및 학칙 등의 형식적인 여러 규정을 충족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규정을 충족한 경우에 학교는 졸업을 인정하고 졸업증서를 수여한다.

졸업증서는 졸업식이라는 일종의 의식(儀式)을 거쳐서 학생에게 전달된다. 졸업은 다음 단계의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직 등에 필요한 한 수단이 된다. 따라서 인생의 계획과 깊이 관련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각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이므로 사회와 국가의 발전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대학이나 대학원을 졸업하면 학사·석사·박사 등의 학위가 수여되며,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과 같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대학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교사자격증이 수여되는 등 각종 자격증이 학위와 함께 수여되기도 한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생들은 인내심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학업에 정진하며, 학교의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경쟁적인 시험에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좀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졸업과 함께 사회에 진출할 때 취직과 명성, 사회적 위신이 따르는 등 특권이 주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학생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그 동안 쌓은 형설의 공을 치하하며, 앞으로 개인의 장래와 사회·국가 발전에 공헌해 달라는 부탁을 학생들에게 하기 위해 대개의 경우 성대한 졸업식을 거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졸업식에서는 입학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총장 또는 학장, 교장과 내빈의 축사가 있고 학생의 답사가 뒤따르게 되며 우등상·공로상·개근상 등의 포장이 있고, 대학에서는 학위를 수여한다.

매년 되풀이되는 행사이기는 하지만, 교사들은 학생들이 성숙해서 나가는 것에 대한 기쁨과 함께 졸업생들의 진로에 대한 염려스러운 느낌을 갖게 되며, 학생들은 학교를 끝마치고 나가는 해방감에서의 기쁨과 함께 수년간 정들었던 학교와 선생님들,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이처럼 졸업은 졸업증명서와 학위를 받아서 나가는 형식 이외에 인간으로서의 희열과 애환이 교차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변천과 현황
  1. 전통시대의 졸업

학생수가 많지 않았던 전통사회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졸업에 해당되는 사회적 지위나 취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라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마쳤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충분조건이기도 하였으며, 대단한 희소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하여 대단한 노력과 성실함이 요구되었다. 전통적 학교교육, 특히 성균관 등에서 실시한 고등교육의 목적은 어느 수준의 지식인을 만드는 양사(養士)에 있지 않고 관리 등용을 전제로 한 탁사(擢士)에 있었으므로, 일정한 수준의 자격을 인정하는 졸업이라는 개념이 희박하였다.

따라서 당시 교육제도에서의 졸업은 과거 급제와 복합, 동화되어 있었으며, 졸업에 따른 행사는 급제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의 성균관이나 향교(鄕校)·사학(四學) 등의 졸업시험인 고과(考課)는 성현의 책을 읽어 터득하는 강서(講書)와 그 터득한 지식으로 창작하는 제술(製述)로 대별되었다.

강서는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낙통(落通)으로 학점이 구분되었고, 제술은 보다 세분되어 상상·상중·상하·중상·중중·중하·하상·하중·하하로 학점이 구분되어 상상은 9분[點], 하하는 1분으로 채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과의 성적은 과거를 치를 때 내신성적으로 반영되어 과거시험의 성적과 합산, 당락을 결정지었다. 이와 같은 학과뿐 아니라, ‘구용지신(九容持身)’이라는 행동고과도 있었다.

구용지신이란 ‘발의 모양은 무거워야 하고[足容重], 손의 모양은 공손하여야 하며[手容恭], 눈은 가지런하여야 하고[目容端], 입 모양은 멈추어 있어야 하며[口容止], 목소리는 고요하여야 하고[聲容靜], 머리는 똑바르게 세워져야 하며[頭容直], 기(氣)는 정숙하여야 하고[氣容肅], 서 있는 모양은 덕이 있어야 하며[立容德], 안색은 장중하여야 한다[色容莊]’는 아홉 가지 몸가짐이다.

이는 일상 행동에서 손발을 가볍게 놀리거나 희로애락을 바로 나타내는 등 9용(九容)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1용당 10점 만점에서 1점씩 감해 내려 지신(持身) 점수가 책정되고, 과거 점수로 상신(上申)되기도 하였다. 고과가 끝나면 임금이 내리는 하사배(下賜盃)로 술을 돌려 마시는 공음(共飮) 의식이 있었다.

‘치서좌(齒序坐)’라 하여 나이 및 생일 차이로 앉아 한 잔의 술을 두루 공음함으로써 임금과 신하로서의 결속, 동창끼리의 결속을 다졌다. 이러한 졸업생에게 술잔을 하사하는 습속은 세종 때 6명씩의 선비를 절에 보내어 독서시키고 그 독서가 끝나면 술잔을 하사하여 공음하게 했던 데서부터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뒤의 기록을 보면, 중종은 태학과 사학에 선도배(仙桃盃)를, 명종은 호박배(琥珀盃)와 수정배(水晶盃)를, 효종은 은배(銀盃)를 공음용으로 하사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요즈음 고등학교의 졸업식이 끝나면 옷과 모자를 찢고 얼굴에 검정이나 밀가루 칠을 하는 풍경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풍습은 전통시대에서도 나타났었다는 점이다.

서울의 사학이나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졸업시험인 고과가 끝나면 학생들은 그들의 제복인 청금(靑襟)을 서로 찢는 폐습이 이따금 거론되었는데, 이를 ‘파금(破襟)’이라 하였다. 학생들에게 푸른 빛이 나는 청금으로 제복을 정한 것은 1477년(성종 8)의 일이다.

성종은 유생이 유복(儒服)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성인의 도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라 하여 제복을 제도화하였으며, 학생들을 ‘청금의 사(士)’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학생들이 제복에 대해 가졌던 반항 심리의 한 단면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서당에서는 졸업을 책씻이·책세식(冊洗式)이라 하였다. 옛날 서당에서는 진도에 따라 개별 교육을 실시하였으므로 졸업도 누구누구의 책씻이 하는 식으로 개별 졸업을 하였다.

책 한 권을 뗄 때마다 베푸는 의식이므로 더 배우고 싶은 아이에게는 진급, 진학식이 되고, 그것으로 끝내고 싶은 아이에게는 졸업식이 된다. 책씻이에는 학부모가 떡·술·돼지고기 등을 마련하여 훈장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게 마련이었다.

  1. 현대의 졸업

졸업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형성되고 그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개화기 이후의 일이다. 근대적 교육기관이 설립되면서 각 학교에서는 주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졸업식이 거행되었으며, 이때 실시된 졸업식의 형태가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학교의 교육내용과 인간의 세태는 많이 바뀌어 가고 있지만 졸업식의 의식과 형태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학생수가 많아지면서 점차 희소가치로서의 의미는 사라져 가고 있으며, 특히 대학 졸업생들의 경우는 졸업을 하고서도 취업난으로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수 없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에 봉착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 들어와 대학에 진학하려는 학생수가 급격히 증가되면서 대학 입학의 문이 좁아지자 과열 과외, 재수생의 누적 등 사회문제가 제기되는 한편, 대학의 안일한 학문풍토와 타성적인 학사관리 등의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81년부터는 졸업정원제가 실시되었다.

졸업정원제는 과거의 입학정원제를 대체한 것으로, 학과별 또는 계열별로 졸업할 때의 정원을 규정하되 입학할 때는 졸업 정원의 30%를 증원 모집하고 증원된 숫자에 해당되는 학생은 중도 탈락시키도록 규정한 것이다.

중도 탈락의 비율이나 방법에 관해서는 대체로 대학의 자율적 규정에 맡겼으나 4학년에 진학할 때 졸업 정원의 1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이 제도의 취지는 입학의 문호를 넓히되 재학중의 면학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며, 대학에 들어오면 누구나 다 졸업할 수 있다는 안이한 사고방식을 시정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증원 모집된 학생들을 강제로 탈락시키는 문제를 안고 있어, 대학측의 반대로 1987년 6·29선언 이후 폐지되었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의 졸업생 수를 1973년 및 1983년과 비교하면, 중학교의 경우 1973년에 46만 7665명, 1983년에 81만 3156명, 1997년에 82만 4518명으로 증가되었으며, 고등학교(일반)의 경우는 1973년에 10만 1619명, 1983년에 31만 6302명, 1997년에 39만 7702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러한 증가현상은 고등교육기관에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대학의 경우는 1973년에 2만 8775명에서 1983년에 7만 7272명, 1997년에 19만 2465명으로 나타나, 1973년에 비하면 6.9배, 1983년에 비하면 2.5배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다. 대학원 역시 1973년에 2,463명, 1983년에 1만 3214명, 1997년에 3만 5147명으로 높은 증가를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현대 산업사회에서 졸업이 갖는 의미는 학교의 졸업생이 희소가치를 가지고 있던 전통사회 또는 근대 초기사회에서와는 매우 다르다. 지난날에 볼 수 있었던 사회적 특권과 취업에 대한 보장이 이미 오늘날의 졸업에는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또한 현대사회가 실질적으로 학문적 능력이나 인격적 성장을 중요시하기보다는 학교의 형식적인 졸업증명서로 그 사람을 평가해 버리는 자격증의 폐단에 젖어들고 있다. 이러한 형식주의의 단점을 극복하는 것도 오늘날 졸업에 관련된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
『조선왕조실록』
『교육통계연보』(교육부, 1997)
『한국교육연감』(대한교육연합회, 1985)
『문교통계연보』(문교부, 1973·1983)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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