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교량 및 호남·호서지방의 조운(漕運) 등에 관한 사무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한강은 강 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강남과 강북을 내왕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하여 한강에는 일찍부터 한강진(漢江津)·노량진(露梁津)·송파진(松坡津)·광진(廣津) 등의 나루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국왕이나 국장(國葬)행렬이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없다는 문제 때문에 연산군 때 배다리[舟橋]를 놓았다. 조선 후기에도 간혹 배다리가 가설되었다. 특히 정조가 온양온천과 선릉(宣陵)·정릉(靖陵)·장릉(章陵)에 갈 때 노량진에, 그리고 헌릉(獻陵)·영릉(英陵)·영릉(寧陵)에 갈 때 광나루에 배다리를 놓았다.
1789년(정조 13)에는 왕명에 따라 이를 전담하는 상설기구로 주교사를 설치했다. 이 때 왕은 친히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제정해 그 운영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주교사의 관원은 도제조 3인, 제조 6인, 낭청 3인을 두었는데, 대개 준천사의 관원이 겸임하였다.
국왕이 강을 건널 때는 유도장신(留都將臣) 중에서 주사대장(舟師大將)을 임명하였다. 필요한 경비는 영남 별회곡(別會穀) 2,000석과 호남·호서 지방의 세곡을 운반하고 받는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배다리 가설에는 경강선(京江船) 수백 척과 격군(格軍) 1,000명이 동원되었다. 이를 단속하기 위하여 3선(船)을 1종(䑸), 5종을 1영(領)으로 삼아 각기 영장(領將)을 두어 지휘하게 하였다. 한편, 각 선박에는 두 개의 기를 꽂고, 한쪽에는 종선(䑸船)의 차례를, 다른 한쪽에는 물흐름의 형상을 그려서 표시하도록 했다.
주교사에서는 배다리를 원활하게 가설하기 위해 1793년 36개조의 『주교사절목( 舟橋司節目)』을 제정하였다. 후에 조성된 주교선은 교배선(橋排船) 38척, 좌우호위선 12척, 난간선(欄干船) 240척이었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하고 그 사무를 금위영(禁衛營)에 이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