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두화는 붓과 같은 서사(書寫)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 손의 일부를 이용하여 그린 그림을 말한다. 손가락, 손톱, 손바닥, 손등 등에 먹을 묻혀 전통적인 모필화법(毛筆畵法)과 차별되는 파격적인 미감을 표출하는 독창적인 화법이다.
8세기 중국 당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전하며, 18세기 초에 청나라의 화가 고기패(高其佩)에 의해 크게 유행하였다.
이이명(李頤命)이 1720년 연행 시에 지두화와 조화(爪畵)를 감상하고 지두산수화를 지인에게 선물한 사실을 통해 그 이전에 지두화에 관한 인식이 조선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고기패의 인척으로 지두화에 능하였던 주윤한(朱倫瀚)의 작품이 1712∼1722년에 전래되기도 하여 18세기 초반에는 조선에 지두화가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은 지두화의 특징인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회화 양식과 간결하고 생략적인 묘사에 주목하였다. 18세기에 강세황(姜世晃) · 허필(許珌) · 심사정(沈師正)이 그린 지두화는 점획이 굳세고 속태가 적으며 고의(古意)가 많은 특징을 보인다.
19세기에 활동한 윤제홍(尹濟弘)은 구불거리고 짧은 지두선을 활용하여 성긴 듯하면서도 사물의 정수를 잘 표현하였다. 속기 없는 간결한 선으로 그려진 『학산묵희첩(鶴山墨戱帖)』은 지두서(指頭書)와 지두화가 결합된 새로운 양상을 보여 준다.
허련(許鍊)의 『소치화품(小痴畵品)』은 지두화법을 기반으로 갈필을 즐겨 사용한 그만의 독특한 지두화풍을 보여 준다. 이 외에도 오기봉(吳起鳳)이 지두화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이후 1920년대에 활동한 황성하(黃成河)는 지두화에 기반을 둔 ‘우청(友淸) 양식’을 정립하는 등 지두화의 명맥을 이어 나갔다.
대표작으로는 강세황의 「고목죽석도」(개인 소장), 허필의 「인물산수화」(개인 소장),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 중 심사정의 「호산추제(湖山秋霽)」(간송미술관 소장), 윤제홍의 『학산묵희첩』(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허련의 『소치화품』(일본 개인 소장), 황성하의 「월조간송도(月照磵松圖)」(개인 소장) 등이 있다.
18세기 무렵 조선에 전래된 지두화는 남종문인화풍의 유행과 함께 고졸(古拙)과 사의(寫意)를 추구하며 강한 먹과 속도감 있는 조선 지두화만의 특징을 형성해 나갔다.
지두화는 후대 화가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계승되었으나 발전하지 못하고 점차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