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선(土船)이라고도 불렸다. 지토선의 명칭은 구체적으로 경기선(京畿船)·호남선(湖南船)·영남선(嶺南船) 등 도별로, 또는 송도선(松都船)·홍산선(鴻山船) 등 고을별로 불렸으며, 형태에 따라 삼선(杉船)·통선(桶船)·노선(櫓船)·광선(廣船)·협선(挾船) 등으로, 그리고 크기에 따라 대선(大船)·중선(中船)·소선(小船)·소소선(小小船)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용역에 따라서는 어선(漁船)·상선(商船)·시탄선(柴炭船)·급수선(汲水船) 등의 명칭이 있었다.
지토선은 일찍이 삼국시대 이래로 존재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선술이 발달하고 선운업이 성장하면서 선형(船型)과 선종(船種)에서 다양성을 나타내게 되었다. 즉, 초기에는 대체로 규모가 소형이고, 구조도 단순하여 연해안이나 강변마을에서 배를 사용할 어부나 선인(船人)이 직접 제작하거나, 지방 관아에 속해 있는 선장(船匠)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다.
선박의 형태가 소형이고 원시적이어서 처음에는 근거리 항해를 통하여 주로 어로활동에 참여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상선으로서의 소임이 증대되고, 운송선으로서 그 용도가 중시되면서 적재능력이 제고되었다. 따라서 그 구조 역시 대형화·전문화되어 갔다.
경상도 지방에서 그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던 대광선(大廣船)의 경우, 본판장(本板長)이 80척 이상이었다. 당시 범선에서도 대선의 본판장이 70척이었다. 그리고 지토선을 운항하는 데는 노를 저어 내는 힘이 중심이었지만, 그 운항능력을 높이기 위해 풍력을 이용, 쌍돛도 널리 쓰였다.
어선에 불과하던 지토선은 조선 후기에 상업이 발달하면서 상선으로서, 그리고 당시 최대의 운송 물량인 세곡(稅穀)과 소작료를 임운하면서 운송선으로서 역량을 발휘하였다. 당시 지토선의 활동기지로는 김해의 칠성포, 나주의 영산포, 영광의 법성포, 은진의 강경포, 아산의 공세리 등의 포구가 주목되고 있으며, 그 분포는 연해안이나 하천 주변의 고을에 걸쳐 있는데, 특히 삼남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18세기의 예를 보면, 거제에 1,428척, 고성에 648척, 흥양(興陽)에 518척 등 수백 척의 선박을 보유한 고을도 적지 않았다.
지토선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와 함께 본격화되었는데, 조운제(漕運制)가 붕괴되면서 전세곡도 운송하기가 곤란한 지경이었기 때문에 운송체계를 확보하고 있지 않았던 대동미의 운송은 전적으로 지토선이 감당해야 했다. 이때 경강선(京江船)·도감선(都監船)·안부선(案付船) 등도 세곡운송에 참여했지만, 지토선은 정부의 법적 배려에 의하여 우선권을 확보하고 세곡운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지토선의 임운활동은 선운업의 자율적인 성장을 촉진하였고, 선인들로 하여금 선가(船價)·임가(賃價)를 통한 재화 축적을 가능하게 하여 그 전문적인 지위를 구축하게 했으며, 나아가 이 시기에 성장하고 있던 유통경제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키는 매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