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에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발견된 덕흥리벽화고분은 그의 무덤이다. 이 고분은 석실봉토분으로 묘실은 연도와 전실 · 통로 · 후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실 · 후실의 천장은 궁륭식에 고임식을 더한 형태이다.
연도 · 통로의 천장을 제외한 전벽면에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다. 주된 내용은 생활풍속도이며, 천장에는 천상세계를 그렸다. 한편 56개소에 6백여 자(字)의 묵서가 있는데, 크게 묘주의 묘지명(墓誌銘)과 벽화의 설명문으로 나누어진다. 현재 판독 가능한 글자가 560여 자로서 벽화와 더불어 고구려 중기사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되고 있다.
묘지명에 의하면 묘주의 성씨는 글자를 알아볼 수 없으나 이름은 진(鎭)이다. □□군 신도현 도향 □감리(□□郡 新都縣 都鄕 □甘里) 출신으로, 건위장군 국소대형 좌장군 용양장군 요동태수 사지절 동이교위 유주자사(建位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龍讓將軍 遼東太守 使持節 東夷校尉 幽州刺史)를 역임하였다.
77세에 사망해 408년(永樂 18) 12월 25일에 이 고분에 안장(安葬)되었으며, 이듬해 2월 2일 무덤은 폐쇄되었다. 그런데 그의 성씨와 출신군명(郡名)이 불확실해 그의 출신국에 대해 상당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먼저 북한의 김용남 · 주영헌 · 박진욱 · 손영종 등은 그를 고구려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①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은 평안북도박천(博川) · 운전(雲田)지역에 비정된다. ② 고구려가 중국 지역을 차지했을 때에 군현제로 편성된 기존의 행정체계를 그대로 이용했을 것이며, 고구려도 4세기 말 5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군현제가 실시되었다. ③ 덕흥리고분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이 한족(漢族)이나 선비족(鮮卑族)의 묘제와는 전혀 다른 전형적인 고구려 고분이다.
④ 진이 통치한 유주(幽州)의 13군 75현은 중국 역대의 유주와 그 구성이 다른데, 이는 고구려의 유주로서 전연(前燕)의 멸망으로 북중국이 혼란에 빠진 시기에 유주를 점령해 370년에서 376년 사이에 일시적으로 통치한 결과이다. ⑤ 진이 역임한 관직은 고구려의 관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실제로 수행한 직무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한국의 김원룡(金元龍) · 공석구(孔錫龜) · 임기환(林起煥), 중국의 유영지(劉永智), 일본의 다케다(武田幸男) 등은 북한의 진(鎭)=고구려인설을 비판하고 진이 중국인이라는 설을 주장하였다. 그 근거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① 진의 출신지인 신도현은 중국 안평군(安平郡:長樂郡)의 속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② 진이 역임한 관직 중 국소대형(國小大兄)을 제외한 장군호 및 관직명은 진(晉)대의 중국의 관직제와 일치하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관직으로 볼 수 없다.
③ 덕흥리고분의 형식이 당시 고구려의 전통적인 묘제인 적석총(積石塚)과 다르고, 위진(魏晉)대의 중국 묘제와 일치하고 있다. 또한 벽화의 내용이나 묘지(墓誌)의 형식, 벽화설명문 등의 형식이 중국의 그것과 일치하고 있다. ④ 고구려의 요동 진출이 385년 이후의 일이므로, 370년 경에 유주로의 진출을 인정하기 어렵다.
다만 당대 유주의 구성과 다른 구성을 보이는 것은 후한(後漢) · 위초(魏初)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그의 출신국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도 견해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지만, 대체로 진이 중국인 망명객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음 망명 후 그의 정치적 위상에 대한 이해도 논란이 적지 않다.
이는 그가 역임한 관직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유주자사를 비롯한 여러 관직을 그가 망명 후 스스로 칭한 허구의 직책으로 보거나, 고구려 정권과의 관계에서 부여받은 관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4세기 후반에 평양 일대에 독자적인 중국인 세력집단이 존재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덕흥리고분의 피장자인 진도 망명 후 고구려 정권의 지방관으로서 이 지역에 파견된 인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