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원당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 후기, 세자 교육을 담당한 세자부의 부속 관청.
제도/관청
설치 시기
1391년(공양왕 3)
폐지 시기
1392년(태조 1)
상급 기관
세자부
내용 요약

징원당은 고려 후기에 세자 교육을 담당한 세자부의 부속 관청이다. 세자 교육을 위해 서연을 개설하였던 공양왕은 1391년(공양왕 3)에 징원당을 설치하고 세자부 소속의 좌우사경을 독립시켜 배속시켰다. 당시 세자부 안에 동궁 사무를 관장하는 춘방원이 따로 설립되었던 것으로 보아 세자 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보좌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정의
고려 후기, 세자 교육을 담당한 세자부의 부속 관청.
설치 목적

공양왕이 세자 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세자부에 설치하였다.

기능과 역할

징원당의 기능과 역할은 분명치 않다. 다만 사경주1을 개편한 것이라는 점, 3~6품의 시학을 각각 개편한 주2 · 필선 · 문학 · 사경 가운데 지위가 가장 낮았다는 점, 징원당 설치 당시에 동궁 사무를 관장하는 주3을 따로 설치하였다는 점 등을 보면, 세자 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보좌하는 기능과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변천 사항

1391년(공양왕 3)에 설치하였다. 1390년에 공양왕은 세자 교육을 위해 서연관(書筵官)을 설치하여 주4 · 주5과 시학을 두었다가 폐지하고, 세자부를 설치하여 지서연은 좌우사(左右師)로, 동지서연은 주6으로, 3~6품의 시학은 각각 좌우보덕(左右輔德) · 좌우필선(左右弼善) · 좌우문학(左右文學) · 좌우사경(左右司經)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좌우사경은 서연 소속의 6품 시학을 개편한 것이었다. 1391년 세자부 내에 징원당을 따로 설치하고 세자좌우사경을 징원당좌우사경으로 개칭하여 배속시켰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인 1392년(태조 1)에 세자 관속을 설치하면서 징원당을 폐지하고 좌우사경을 세자 관속으로 다시 소속시켰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논문

이진한, 홍완표, 「고려시대 동궁 4품 이하 관직의 제수와 녹봉」(『한경대논문집』 32, 2000)
주석
주1

고려 시대에, 동궁에 속한 벼슬. 공양왕 2년(1390)에 보덕(輔德)으로 고쳤으며 삼품에서 육품까지 두었다.    우리말샘

주2

고려 시대에, 동궁(東宮)에 속한 벼슬. 공양왕 2년(1390)에 삼품의 시학(侍學)을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3

고려 시대에, 동궁(東宮)의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    우리말샘

주4

고려 시대에, 동궁(東宮)에 속한 벼슬. 공민왕 2년(1353)에 설치하였으나 그 뒤에 세자좌사ㆍ세자우사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5

고려 말기에, 동궁에 속한 벼슬. 공양왕 2년(1390)에 두었다가 곧 빈객으로 고쳤다.    우리말샘

주6

좌빈객(左賓客)과 우빈객(右賓客)을 아울러 이르던 말.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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