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상시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국가 제사와 시호의 추증을 관장하던 관부.
제도/관청
설치 시기
성종대|1356년(공민왕 5)|1369년(공민왕 18)
폐지 시기
문종대|1362년(공민왕 11)|1372년(공민왕 21)
내용 요약

태상시는 고려시대에 국가 제사와 시호의 추증을 관장하던 관부이다. 원구단 · 사직단 · 태묘 · 제릉 · 적전 · 선잠 · 문선왕묘의 제사에 참여하거나 군주의 시호를 추증하는 일을 하였다. 성종 대에 태상시가 설치되었고, 문종 대에 태상부로 개편되어 병과 권무관이 되었다. 충선왕이 봉상시, 전의시로 고쳤는데, 공민왕이 다시 태상시로 복구하였고 이후 전의시로 개편되는 과정을 거쳤다.

정의
고려시대, 국가 제사와 시호의 추증을 관장하던 관부.
설치 목적

성종이 국가 제사와 시호의 추증에 관한 업무를 담당시킬 목적으로 설치하였다.

기능과 역할

원구단(圜丘壇)주1 · 사직단(社稷壇) · 주2 · 제릉(諸陵) · 적전(籍田) · 주3 · 주4의 제사에 참여하거나, 군주의 시호를 올릴 때에 주5시책(諡冊)을 읽었다.

변천사항

태조의 장례에서 태상경이 시책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태상시의 설치로 보지는 않는다. 목종 대에 태상경 · 소경(少卿) · 박사(博士) · 사의(司儀) · 재랑(齋郞)의 존재가 확인되므로 성종 대에 3성 6부의 성립과 함께 태상시가 설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종이 태상부(太常府)로 개편하여 병과 권무관으로 삼고 사(使) · 부사(副使) · 녹사(錄事)를 두었다. 다만 문종과 인종의 녹봉 규정에는 녹사만 주6을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1140년(인종 18)에 주7의 복장을 정하는데 태상경이 나타나므로 사 · 부사는 이미 경 · 소경으로 개편된 것으로 생각된다.

1298년(충렬왕 24)에 충선왕이 즉위하여 태상부를 봉상시(奉常寺)로 고쳤고, 1308년에 충선왕이 전의시(典儀寺)로 개편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공민옹이 개혁정치를 시행하면서 태상시로 복구하고 판사(判事) · 경 · 소경 · 박사 · 승(丞) · 직장(直長) · 녹사(錄事)를 두었다. 1362년에 전의시로 고쳤다가 1369년에 다시 태상시로 고쳤고, 1372년에 전의시로 개편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박용운, 『"고려사" 백관지 역주』(신서원, 2009)
이정훈, 『고려전기 정치제도 연구』(혜안, 2007)

논문

박천식, 「고려전기의 시⋅감 연혁고: 태조에서 문종 관제의 성립 기간을 중심하여」(『전북사학』 5, 전북사학회, 1981)
주석
주1

고려 시대부터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던 곳. 또는 제사를 드리던 단.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광무 원년(1897)에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다시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곳으로, 이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서울 조선 호텔 안에 일부가 남아 있다.    우리말샘

주2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주3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했다는 신(神).    우리말샘

주4

‘문묘’의 다른 이름.    우리말샘

주5

고려 시대에, 태상시의 으뜸 벼슬.    우리말샘

주6

고려 시대에 품관(品官)과 이속(吏屬) 사이에 위치하는 준품관적인 직제에게 지급되던 녹봉. 임시 관서의 성격을 띠는 여러 사(司)나 도감(都監)의 실무직에 종사하는 권무관(權務官)의 녹봉은 10등급으로, 최고 60석에서 최하 6석이 있었다.    우리말샘

주7

관리들 사이에 지키는 예절.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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