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육부는 관직체계상 중서문하성이나 상서성의 하급단위 기구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상서도성이나 중서문하성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과 연결되는 등 중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행정제도였다. 이는 고려가 비록 당나라의 제도를 본따기는 했지만 고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행정체계로 운영하려 했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육부의 서열이 당나라에서는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인 데 비배 고려는 이 · 병 · 호 · 형 · 예 · 공이라는 점에서 입증된다.
또한 속사(屬司)도 당나라는 각 부에 4사씩 모두 24사가 있었으나 고려에서는 이부에 속한 고공사(考功司)와 형부에 속한 도관(都官)만이 있었다. 이와 같이 육부체계가 단순하게 조직, 운영된 것은 당나라와는 달리 고려사회가 보다 단순했고 영토가 좁았을 뿐 아니라,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제도도 참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도병마사 · 식목도감(式目都監)과 같은 고려 특유의 합좌기구와 조화를 꾀하기 위해 취해진 점에 의의가 있다.
육부체계는 무신정권기에 기능과 권한이 약해지기는 했지만 그대로 유지되다가,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전리사(典理司) · 군부사(軍簿司) · 판도사(版圖司) · 전법사(典法司)의 4사로 기구가 축소되었다. 동시에 기능과 권한도 도병마사에서 바뀐 도평의사사가 상설기구화됨으로써 줄어들었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의 개혁으로 다시 육부로 환원되었으나 기능과 권한은 복구되지 못하였다. 1362년 전리사 · 군부사 · 판도사 · 전법사 · 예의사(禮儀司) · 전공사(典工司)의 6사로 개편되었고, 1369년 선부(選部) · 총부(摠部) · 민부(民部) · 이부(理部) · 예부 · 공부로 각각 개칭되었다. 1372년 다시 6사로 바뀐 뒤 1389년(공양왕 1) 이 · 호 · 예 · 병 · 형 · 공조의 6조로 개편되었으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허설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