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5세기 초 세종 때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측우대는 그 뒤 여러 번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였지만, 조선시대의 것으로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측우기가 하나, 측우대가 넷뿐이다.
이 측우대는 그 가운데 하나로 특히 측우기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긴 명문이 대리석 4면에 남아 있는 측우대로 기상학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대리석제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30.3㎝, 너비는 45.3×45.5㎝이다.
이 명문에 의하면, “1782년(정조 6) 정조가 여름가뭄을 걱정하여 창덕궁의 이문원(璃文院) 앞마당에 측우기를 만들어 세웠다”고 적혀 있다. 기우제를 지내고, 언로를 열며, 죄인을 풀어주는 등의 조처가 계속되자, 가뭄이 그치고 비가 흡족하게 내렸다. 이를 기념하여 임금과 백성의 근심과 기쁨이 함께 얽혀 이 측우기를 만들었다고 직제학 심염조(沈念祖)는 글을 지었다. 1782년의 가뭄 끝에 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측우대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측우대는 1910년에는 창덕궁 규장각 앞뜰에 있었고, 1920년쯤에는 당시 경성박물관 앞 계단에 옮겨졌는데 그 때까지도 측우기가 그 위에 함께 있었다. 그 뒤 6 · 25전쟁 때 측우기는 없어지고 측우대만 남아,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