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9년(선조 12)에 방응현(房應賢) 등 유림의 공의로 노진(盧禛)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지방(機池坊, 현 금지면)에 고룡서원(古龍書院)을 세워 위패를 모셨다.
정유재란으로 다른 건물은 소실되고 사우(祠宇)만 보존되어오다가 1600년에 ‘창주(滄洲)’라 사액되어 창주서원으로 개칭,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그 뒤 1960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5칸의 강당, 내신문(內神門), 각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5칸의 전사청(典祀廳), 외신문(外神門), 외문(外門) 등이 있다. 사우에는 노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생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 · 서재는 수학하는 유생이 기숙하는 곳이고,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다.
이 서원은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현, 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다. 매년 3월 20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퇴계선생문집부록 退溪先生文集附錄》 1책 등 100권의 문헌이 있다. 재산으로 대지 1,500여평, 전답 7,600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