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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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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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개념
청자를 재현하는 기능 및 그 기능보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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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청자를 재현하는 기능 및 그 기능보유자.
내용

고려청자에 이어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의 흐름으로 발달한 우리나라의 도자기는 1883년(고종 20)에 광주 분원(廣州分院)이 폐쇄됨으로써 1천년을 풍미하던 역사를 공식적으로 마감하였다.

분원의 폐쇄 이후 민요(民窯)에서의 간헐적인 생산활동이 있었지만, 일본 도자기의 범람으로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기는 그 맥이 단절되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창적인 기법과 유려한 선, 그리고 벽옥(碧玉) 같은 비색(翡色)으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던 청자를 재현하는 것은 민족문화의 자긍심을 되살리는 작업의 하나였다.

청자도공은 경기도 광주·이천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공들과 고려청자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도공들로 대별되는데,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청자재현가가 조기정(曺基正)이다. 조기정은 대학시절부터 국가적 자원 조사에 관심이 많아 도자기의 원료를 연구하면서 도예계에 발을 디뎠다.

전라도 지역의 옛 도요지 1,000여 곳을 발견 조사하고, 옛 도요지의 발굴에도 대부분 참여하였으며, 1966년에는 무등요(無等窯)를 창건하여 도토와 유약을 관계기관과 협조하여 분석·실험·연구하였다.

마침내 그는 매용제(煤熔劑: 유약을 빨리 녹게 하는 재료)로써 칼슘과 색을 내는 철의 함량에 청자의 비밀이 있다고 보고 1970년 ‘칼슘철유설’을 과감히 주장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전통도자기는 옹기와 같이 초목회유(草木灰釉)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패각(貝殼: 조개 껍데기) 등에서 얻은 칼슘철 유약의 두께 차이와 태토에 따라 청자와 백자로 나타나는데, 유약이 두꺼우면 청자의 푸른 빛을 띠고 유약이 얇으면 분청사기와 백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학계에서는 그의 주장을 일축하였으나, 확고한 신념 아래 1977년 강진요(康津窯) 기술담당 이사로 참여하여 청자 재현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칼슘철 유약으로 재현한 청자를 세상에 내놓아 검증하게 되었는데 90%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청자·분청사기·백자를 동일 가마에서 동질 유약으로 구워내는 데 성공한 그는, 1983년 『고도자소고』에서 칼슘철유설을 정리하였다.

또 같은 해 해남군 신이면의 녹청자요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우리나라의 청자는 강진을 중심으로 하는 해무리굽 청자 외에도 해남을 중심으로 유형이 전혀 다른 녹청자 계열이 민간의 수요로 발달하였다는 사실을 발표하였으며, 1987년 『녹청자소고』라는 소책자로 정리하였다.

조기정은 1982년 도자 원료의 산지인 광주광역시 광산구 연산동으로 무등요를 옮겨 ‘무등도요’로 개칭하고 칼슘철 유약으로 고려청자 재현작업을 계속하면서 찬란한 도예문화의 부활에 전념하고 있다. 1997년 전시관을 완공하여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도록』(광주광역시, 1997)
『녹청자소고』(조기정, 1987)
「高麗·朝鮮現代陶藝選」(일본 매일신문사, 1985)
『고도자소고』(조기정, 1983)
『내고장의 전통』(강진군,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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