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서언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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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삼경을 해석하여 1590년에 간행한 주석서. 유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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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서삼경을 해석하여 1590년에 간행한 주석서. 유학서.
내용

≪대학언해≫ 1권 1책, ≪중용언해≫ 1권 1책, ≪논어언해≫ 4권 4책, ≪맹자언해≫ 14권 7책의 사서와 ≪주역언해≫ 9권 5책, ≪시경언해≫ 20권 10책, (판본에 따라 5·7책으로도 되었음.), ≪서전언해≫ 5권 5책의 삼경을 통칭 칠서언해라고 한다.

사서언해의 최고본은 1590년(선조 23)의 내사기(內賜記)가 있는 도산서원본이 있고, 다음 1611∼1612년(광해군 4)의 내사기가 있는 규장각본이 전하는데, 이들은 모두 활자본이다. 그리고 1631년(인조 9)의 내사기가 있는 판본이 전하는데 목판본이다. 이 사서언해는 각 지방에서 교재용으로 많이 간행되었다.

삼경의 현존본 중에는 1606년의 ≪주역언해≫, 1613년의 ≪시경언해≫ 등 내사기가 있는 활자본이 현재 최고본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언해사업은 본래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였고, 성종 때도 유숭조(柳崇祖)가 구결(口訣) 또는 토(吐)만을 달아놓았다고 한다.

언해사업이 본격화한 것은 선조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선조는 교정청(校正廳)을 설립하고 경서에 구결을 달고 언해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렇게 간행한 교정청본을 관본(官本)이라고 하여 개인본과 구별하였다. 1586년 ≪소학≫과 사서의 언해가 모두 끝났고, 1588년 사서삼경의 언해가 끝나 상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삼경은 선조 때의 것이 전하지 않으며, 다만 광해군 때의 판본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삼경도 광해군 때의 사서와 더불어 선조조본의 재간본으로 간주된다.

사서의 경우 이들은 모두 16세기말로부터 17세기초의 국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으나, 표기법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고, 다만 선조조본에는 방점(傍點)이 표기되어 있으나 광해군본이나 기타본에는 방점표시가 없다.

광해군본을 중심으로 볼 때 표기법 중 특기할만한 것은 ㅿ자와 ᄠᅳᆷ자의 사용을 들 수 있다. ㅿ자는 ㅇ이나 ㅅ으로 나타나 상당히 혼란된 양상을 보이며 한자음의 표기에는 ㅿ자가 많이 쓰였다. 어두자음군은 ㅂ계와 ㅅ계가 두루 쓰였다.

‘되― (爲)’는 ‘도외―’, ‘도이―’, ‘되―’가 공존하고 있으며, ‘ᄒᆞ―’의 사동형은 ‘ᄒᆞ이―’, ‘ᄒᆡ이―’가 다 쓰였다.

그리고 ‘―도다’에 대한 ‘―두다’가 보이고, 비교를 나타내는 후치사(後置詞)에는 ‘―에셔’, ‘―도곤’, ‘―두곤’이 쓰이고 있어, 이 책은 16세기와 17세기를 잇는 과도적 교량의 특성을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후대에 각 지방에서 간행한 ‘칠서언해’들은 그 보수적 표기와 복각(覆刻)의 단점 때문에 국어연구의 중요한 자료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고친한글갈』(최현배, 정음사, 1961)
「십칠세기국어의 연구」(전광현, 『국어연구』 19, 1967)
「대학언해의 율곡본과 관본과의 비교연구」(이숭녕, 『동교민태식박사고희기념논총 불교학논총』, 1972)
「사서언해 해제」(이숭녕, 『사서언해』, 한양대학교, 1974)
「중세어의 한글자료에 대한 종합적 검토」(안병희, 『규장각』 3, 1979)
집필자
전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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