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부는 흔히 훈관(勳官)의 의미를 지닌 검교직(檢校職)으로 주어지고 또 수직(守職)으로 제수되었다. 그래서 사서(史書)에는 보통 검교태부(檢校太傅) 또는 수태부(守太傅)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태부가 언제부터 수여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서희(徐熙)가 996년(성종 15) 이전 언젠가부터 사망하는 998년(목종 1)까지 삼사의 하나인 태보 · 내사령(內史令)으로 재임하던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982년(성종 1)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 등 중앙 관제가 중국 제도를 수용하여 크게 마련되었을 때, 태부를 비롯한 삼사직(三師職)도 설치되었을 것이다. 이후 태부를 포함한 삼사의 제수는 관제 정비로 인해 승진이 봉쇄되었던 관료들에게 그 기회를 열어주는 창구로 활용되면서 의종(毅宗) 때까지 지속되었다.
태부를 비롯한 삼사의 제도는 무신정변(武臣政變)을 계기로 중단된 듯하며, 원(元)나라의 내정 간섭이 시작된 충렬왕(忠烈王) 때에는 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이르러 예전대로 복구되었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다시 혁파되었다.
이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초기와 중기의 여러 왕들도 중국의 역대 왕조로부터 책봉(冊封)의 형식으로 태부를 제수 받은 적이 있다. 1100년(숙종 5) 숙종(肅宗)이 요(遼)나라로부터 검교태부를 제수 받은 것이 그 일례이다.
한편 1068년(문종 22)에 마련된 동궁관(東宮官)의 직제(職制)에는 종1품의 태자태사(太子太師) · 태자태부(太子太傅) · 태자태보(太子太保)가 각각 1인씩 배정되어 있는데, 정1품의 삼사를 본떠 마련한 것이다.
태부를 비롯한 삼사는 실제 직사가 부여된 관직은 아니지만, 정1품으로 가장 높은 관품을 부여하여 정치적 지위와 명예를 지닐 수 있도록 우대하였다. 이는 주요 대상인 종실과 재상들도 국왕 아래의 관료 체계 내에 있음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