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4판. 8면. 우리나라 최초의 주간지로 1918년 9월 창간되어 1919년 2월 16호로 종간되었다. 주간은 장두철(張斗澈)로 발간 당시에는 종합지의 성격을 띠고 문예작품 외에도 취미기사를 실었으나 그 뒤 곧 문예지의 성격을 띠었다.
주요 내용은 창작시 · 번역시 · 창작소설 · 번안소설 · 외국문학과 문단 사정의 소개, 시론(詩論) 등으로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시와 해외 시의 수입 · 소개를 겸한 이론들이다. “본보는 저 태서(서양)의 유명한 소설 · 사조 · 산문 · 가곡 · 음악 · 미술 · 각본 등 일반문예에 관한 기사를 문학 대가의 붓으로 직접 본문으로부터 충실하게 번역하여 발행”할 것이라고 밝힌 창간호의 권두언이 이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김억(金億) · 이일(李一) · 장두철 등이 중심이 되어 서구문예의 도입 소개에 주력하였다.
1919년 2월 16일까지 약 5개월(21주) 동안 16호를 내고 있으니, 매주 정기적으로 발행되지는 못한 셈이지만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서는 좋은 성적이라 할 수 있다. 편집 · 발행자들의 열의를 짐작할 수 있다. 매호 권두에는 사설(社說, 에디토리얼)을 싣고 있으며 음악 · 미술까지도 포함한 예술 전반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학 중심으로 편집되었다.
특히 시를 제외한 다른 장르는 별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준시전문지(準詩專門紙)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김억의 번역시와 시론은 한국 근대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바 있으며 이 번역시들은 뒷날 한국 최초의 시집인 『오뇌의 무도』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과거 『소년』 · 『청춘』을 통하여 발표된 최남선(崔南善)이나 이광수(李光洙)의 시가 포에지(poésie, 시정신(詩精神))를 결여한 채 형태만의 새로움을 내세웠다면, 『태서문예신보』에 실린 김억 · 황석우(黃錫禹)의 창작 시편들은 개성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한 개성적인 운율의 창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를 근대문학에 대한 최초의 자각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번역시와 외국 시론의 소개와 함께 총 38편의 창작 시를 싣고 있는 이 문예지는 『창조』로부터 시작되는 한국 근대문학의 개화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문학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