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여럿으로 나누어져 다두석부(多頭石斧) 또는 별모양으로 돌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형석부(星形石斧)’ 또는 ‘별도끼’로도 불린다. 바퀴날도끼와 함께 의식용으로 쓰인 것 같다.
일반적인 형태는 중앙이 불룩하고 주위로 갈수록 두께가 얇아지는 바둑돌같이 생긴 원반석(圓盤石)의 둘레를 톱니처럼 간격을 두어 여러 가닥의 뿔같은 돌기를 만들어 많은 날을 형성한 것이다.
중심부에는 막대기를 꽂기 위한 큰 구멍이 있고 이 중심구멍에서 돌기 사이로 방사선상의 홈을 파놓았다. 중심부의 단면은 렌즈형도 있으나 구멍 주위 상하로 둥근 돌출부가 있는 것도 많으며 단면이 삼각형인 것도 있다.
이런 일반적인 형태와는 달리, 특이하게 이중식 톱니날도끼[二重式多頭石斧]라 하여 돌기가 달려 있는 중앙부 단면이 실패형으로 되어 있고 아래위로 이중의 돌기들이 서로 교차해 뻗어나간 형태도 있다.
그리고 좌우대칭으로 2개의 돌기만이 달린 이두석부(二頭石斧)도 한 예가 있다. 또한 환상석부(環狀石斧)에 방사선형의 능선만 세우고 톱니같은 돌기를 만들지 않아 톱니날도끼의 흉내만 낸 중간형도 보인다.
톱니날도끼의 날[刃]을 이루고 있는 돌기의 형태도 다양하다. 원반의 둘레를 넓게 파고 안으로 갈수록 좁게 파서 돌기가 삼각형이고 전체 형태가 별모양을 이룬 것이 많다.
이 밖에 돌기가 길쭉한 네모꼴이 되어 수레바퀴살형을 이룬 것, 끝이 약간 넓은 사다리꼴 형상의 것, 돌기가 밖으로 갈수록 폭이 넓어지는 부채살모양의 것 등이 있다. 가장자리의 돌기수는 2개에서 18개까지 있는데, 4개에서 10개 사이의 것이 대부분이다.
이 석기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막대기의 끝에 꽂아서 사용한 곤봉두(棍棒頭, mace-head)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집터의 출토 예로 보아 실제로 사용한 것도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이들 중 정교하고 장식적인 것들은 권위의 상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곤봉두의 일종인 바퀴날도끼에서 변화되어 발생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계통이 동일한 것만은 확실하다.
분포지역은 중국 내몽고 열하지방(熱河地方), 일본, 코카서스(Caucasus) 등의 유라시아 각지, 남방의 도서지역을 비롯해 중남미대륙에도 그 존재가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분포는 한강유역의 파주 옥석리(玉石里), 남양주 지금리(芝錦里)까지가 하한선이다. 주로 서북지방과 동북지방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인다. 이는 바퀴날도끼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는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우리나라 톱니날도끼 출토 유적으로는 평안북도 강계군 공귀리, 영변군 세죽리, 평안남도 평양시 와산동, 강남군 원암리, 황해도 송림시 석탄리, 인산군 주암리, 경기도 파주시 옥석리 등의 주거지 유적과 함경북도 경원군 봉산리, 종성군 종성읍, 봉의동 등 산포지 유적(散布地遺蹟)을 들 수 있다. 팽이형토기[角形土器] 주거지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이 특징적이며 바퀴날도끼와 반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톱니날도끼는 현재 분포지로 보아 내몽고지방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열하 동가영자(東家營子)의 6두부나 열하 소고륜(小庫倫)의 이중식6두부 등은 우리나라의 것과 같은 형식이다.
이들은 유라시아 각지에서 사용되던 석제·청동제 곤봉두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우리나라 톱니날도끼도 크게 보아 유라시아 곤봉두문화의 한 갈래로 여겨진다. 연대는 출토 유적과 반출유물로 미뤄볼 때, 청동기시대(무문토기시대) 전기에서 중기 사이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