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교하동 소재 장명산(長命山)에서 동남으로 계속되는 능선상에 위치한다.
고인돌은 남방식과 북방식이 섞여서 약 1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이 중 5기가 조사되었다. 3기는 개석(蓋石)만이 남아 있고 그 아래에서는 아무런 유구(遺構)도 발견되지 않았다.
나머지 2기 중 ‘라’호 고인돌은 길이 3.3m, 너비 1.9m의 개석 아래 길이 70∼80㎝의 판석(板石) 2매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고, 이 판석 아래는 풍화암층(風化岩層)으로 되어 있었다. 이 기반층을 바닥으로 해서 판석으로 된 소형의 석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물로는 개석 아래에서 반달돌칼[半月形石刀] 1점만이 출토되었다. ‘마’호 고인돌은 개석의 두께가 50㎝를 넘고 지석도 두께 40㎝ 내외의 두꺼운 석재를 사용한 북방식으로 석실의 크기는 45∼90㎝ 가량이 된다. 도굴되어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주거지는 2기가 조사되었다. 1호 주거지는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내려 가서 만든 길이 9.5m, 너비 3.2m, 깊이 35∼70㎝의 장방형 움집터[竪穴住居址]로서 불에 탄 것이다. 수혈의 중앙 장축선과 네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기둥구멍이 배치되었다. 화덕자리[爐址]는 중앙에서 동쪽으로 치우쳐 두 곳에서 발견되었다.
화덕들은 길이 60㎝ 정도의 타원형으로 아무런 시설없이 우묵하게 패였다. 바닥에는 배수구(排水溝)로 생각되는 좁고 얕은 홈이 나있었다. 유물로는 깊은 바리[深鉢形]의 구멍무늬토기[孔列文土器]조각과 편평단인석부(扁平單刃石斧)가 출토되었다.
2호 주거지는 ‘라’호 고인돌 밑을 조사하다가 발견된 것으로, 이 주거지의 한 쪽 모서리가 고인돌 밑에 들어 있었다. 역시 평면이 장방형이며 풍화된 화강암반을 파고 들어간 수혈이다. 규모는 길이 10m, 너비 4.4m, 깊이 50∼70㎝ 정도이다.
기둥구멍은 벽면을 따라 많이 발견되었지만 배열이 고르지 못하다. 화덕은 남쪽 벽에 치우쳐 있었고 역시 주위에 아무런 시설이 없었다. 출토유물로는 마제석촉, 민무늬토기조각, 약간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조각이 있다.
이 유적은 인근 파주 옥석리 유적과 함께 고인돌의 선후관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주거지는 형태와 출토유물로 보아 옥석리 주거지와 같은 성격이며, 구멍무늬토기의 존재로 보아 함경북도 지방의 문화파급을 짐작할 수 있다.
연대는 옥석리 주거지의 탄소측정연대로 미뤄볼 때, 서기전 1000년대 전반에 속하며 중부지방 주거지 유적으로는 비교적 이른 시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