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으나 1991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에 통합되면서 지정 해제되었다. 고법은 판소리 반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고수를 따로 내세우는 일이 없어 조선시대에 명고수 이름이 전하는 이가 매우 드물다.
다만 고수로 행세하다가 다음에 명창이 되어서 이름이 전해지는 이는 조선 순조 때 가왕(歌王)송흥록(宋興祿)의 소리에 북을 쳤던 송광록(宋光祿) 및 주덕기(朱德基)와 고종 때 송만갑(宋萬甲) 및 김채만(金采萬)의 소리에 북을 쳤던 장판개(張判介) 및 김정문(金正文)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소리 명창으로 이름이 전하고 있다.
판소리가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발전함에 따라 판소리고법도 발전되고, 따라서 조선 고종 말기와 일제 때에는 박판석(朴判石) · 오성삼(吳聖三) · 신고주(申高柱) · 주봉현(朱鳳鉉) · 신찬문(申贊文) · 한성준(韓成俊)과 같은 전문적인 명고수들이 나와서 판소리고법을 발전시켰다.
일제강점기 때 유성기 판에 이흥원(李興元) · 한성준 · 정원섭(丁元燮) · 백점봉(白點奉) 등이 판소리 북을 친 것이 보인다. 광복 후에는 김재선(金在先) · 김명환(金命煥) · 이정업(李正業) · 김득수(金得洙)와 같은 고수들이 활동하였고, 1978년에 판소리고법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김명환이 그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85년에 김득수, 1989년 김동준이 기예능보유자로 추가 인정되었다. 그러나 1996년 현재 모두 작고하여 판소리고법에는 기예능보유자가 없다.
판소리고법은 여러 가지 이론이 있으나 크게 자세론(姿勢論) · 고장론(鼓長論) · 연기론(演技論)으로 나눌 수 있다. 고수에 따라 이론이 다르나 대체로 자세론은 고수가 가객의 왼편에서 북을 앞에 놓고 가객을 향하여 책상다리로 앉는다.
그리고 북을 왼편으로 당겨 가죽이 좌우로 향하게 세워놓고 왼손 엄지를 북의 왼편 통에 걸치고 손을 펴고 손가락을 모아 북의 왼편 구레를 치며, 오른손으로 북채를 모아 쥐고 무릎 위에 북채를 세워 올려놓았다가 가객의 소리에 따라 치되, 북채가 좌우 몸 밖과 머리 위로 올라가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식지를 위로 세우고 북채를 잡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한다. 고장론은 고수가 가객의 소리에 따라 장단을 친다. 그러나 악절의 시작은 반드시 채로 오른편 가죽을 크게 치고, 소리가 날 때에 채로 북의 반각(半刻)자리를 좀 크게 치고, 소리가 달거나 절반 풀 때에는 채로 북의 매화점(梅花點)자리를 굴려치고, 소리가 졸라 떼어 맺어 떨어질 때에는 채로 북의 온각[全刻]자리를 매우 세게 한번 치며, 소리가 풀 때에는 왼손을 뒷손이라 하여 뒷궁 즉 북의 왼편 가죽을 굴려 친다.
소리가 달고 갈 때에는 매화점자리나 반각자리를 굴려치는 것이 원칙이나 이것이 또드락가락이라 하여 시끄러우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약하거나 뒷손으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연기론은 고수가 가객의 상대역으로 소리와 아니리를 추임새로 받아 주며, 소리에 따라 추임새로 흥을 돋우고 소리의 공간을 메워 가객의 소리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연출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