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동쪽으로 약 40㎞ 떨어진 승호구역 만달리에 있다. 만달리 유적의 남쪽에는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이 거의 동서로 흐르고 있다. 이 동굴은 남강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다. 제2단구에 해당되는 이 유적은 1979년 10월과 1980년 5∼8월에 발굴되었다.
동굴 안의 층위는 중기 구석기문화층에서 신석기문화층까지 셋으로 나누어졌다. 이 유적에서는 사람뼈화석(만달인)과 함께 석기와 뼈도구를 비롯한 많은 짐승뼈화석이 발굴되었다.
아래층인 중기 구석기문화층에서는 5목 13과 34종의 많은 양의 동물화석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사멸종이 6종으로 33.3%를 차지해 승리산 유적의 사멸종 34.9%와 비슷하다. 이렇게 볼 때 중국 산정동 동물상보다는 이르며, 승리산 동물상보다는 늦은 시기로 후기 홍적세의 이른 시기로 보인다.
또한 층서상 의의가 있는 표준화석의 짐승은 말·동굴사자·동굴곰의 3종이다. 이 중 말·동굴하이에나 등이 상원 검은모루보다는 뒷시기인 승리산·대현동 것과 비교되며, 후기 홍적세 초로 보인다. 아울러 짝굽류〔偶蹄類〕가 식육류에 비해 많고, 홑굽류〔奇蹄類〕가 적은 것은 후기의 특성을 반영한다. 대다수의 짐승들로 볼 때, 당시 만달리 일대는 지금보다는 더운 온대성 기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층인 후기 구석기문화층에서는 사람뼈화석과 석기·뼈도구·동물화석이 출토되었다. 짐승은 4목 9과 12속 13종으로 166개의 짐승뼈의 최소 마리수는 38마리이며, 설치목 3마리(7.9%), 토끼목 2마리(7.9%), 식육목 8마리(21%), 짝굽목 3마리(7.9%)를 차지한다. 특히, 사슴과 짐승이 많은데(전체 화석수의 29.7%), 이것은 우리나라 짐승상의 발전에서 늦은 시기에 해당한다. 아울러 빙하기 이후에는 없는 사멸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운데층은 후기 홍적세의 마지막 시기인 대략 2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석기는 모두 13점으로 흑요석 9점, 차돌 3점, 규암 1점이다. 특히, 8점의 좀돌날몸돌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6점은 쐐기모양, 1점은 배모양, 1점은 원판모양이었다. 윗면과 뒷면은 대부분이 자연돌의 겉면 그대로이지만, 다른 곳들은 큼직큼직하게 격지를 떼어냈거나, 떼어내어 다듬은 자리들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특히, 옆에는 정(釘)이나 끌 같은 도구를 대고 때린 돌날떼기수법의 긴 격지자리들이 보인다.
뼈연모는 연장자루(사슴뿔 2점)와 송곳모양이 10점 출토되었다. 연장자루 1점은 단검이나 뚜지개자루로 보인다. 앞끝쪽을 파내고 가운데에 석기를 넣고 묶어 사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 1점은 양끝을 잘라낸 것으로 21㎝쯤 된다. 송곳모양의 연장은 사슴뿔 4점, 짐승뼈 6점으로 만들어졌다. 동물화석은 노루발뼈, 짐승의 뒷발뼈, 하이에나 아래턱조각(넙적끝), 주걱뼈, 다리뼈 등이 나왔다.
석기와 사람뼈가 나온 층은 가운데층으로 그 아래층 (Ⅰ∼Ⅳ층)의 짐승화석들과는 층위를 달리하고 있다. 아래의 짐승화석 중에서 동굴하이에나와 옛소는 후기 홍적세 후기로 보인다. 이처럼 사람뼈화석과 함께 훌륭한 배모양·쐐기모양 좀돌날몸돌석기가 출토된 것을 볼 때, 이 유적은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의 후기 구석기시대 연구에 크게 주목되는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