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금을 징수하기도 하였다. 고려 중기 이후 전시과체제가 붕괴되면서 공전(公田)이 크게 감축되어 국가재정의 기반이 약화되고, 또 무신집권과 몽고침입으로 국가재정이 탕진되자 그 대책으로 제시된 것이 품미(品米)·품포(品布)·품은(品銀)의 조처였다.
1253년(고종 40)에 처음 실시되었으며, 몽고군이 침입하여오자 그들을 철군시키고자 담판하면서 조정에서는 몽고관원들에게 진봉(進奉)하려고 문무관 4품 이상의 관원에게서 백금(白金) 1근씩 징수하였다. 그 뒤 몽고와 화친하여 1259년 태자가 몽고에 가면서 문무관 4품 이상의 관리로부터 역시 백금 1근씩 거출하였다.
품은의 실시는 1260년(원종 1)·1261년·1264년·1266년·1271년·1272년·1275년 등 수시로 자행되어 황금·백금·백은 등을 징수하여 국가재정을 보충하거나, 국왕 및 태자의 친조(親朝) 때의 여비 및 선물비용에 충당하였다.
이와 같이 변칙적인 과렴(科斂)의 유행은 관원들이 백성으로부터 수탈하게 함으로써 민폐의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