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5판. 296면. 1969년 일조각(一潮閣)에서 발간하였다.
이 논저는 11편의 논문이 ① 개화사상 연구, ② 개화운동 연구, ③ 개화기의 인물과 그 활동의 3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1974년 1편의 논문이 추가된 개정·증보판이 314면으로 발행되었다.
1880년(고종 17)대의 개화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논저는, 주로 온건개화파의 사상과 활동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먼저 개화사상에 관한 연구를 보면, 청나라 말에 위원(魏源)이 서양에 대한 지식을 알리기 위해 저술한 『해국도지(海國圖志)』가 개화사상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다룬 「해국도지의 한국 전래와 그 영향」이 있다.
「개화사상연구」라는 논문에서는 개화의 개념이 1870년대는 개국(開國)의 의미로 이해되다가, 1880년대 들어서는 외국 기술의 수용에 의한 부국강병으로, 1890년대와 1900년대에는 국권과 민권을 지칭한다는 전제 아래, 주로 1880년대의 개화사상을 논급하였다.
저자는 이 시기의 개화를 실학의 연장에서, 동도서기론적(東道西器論的)인 입장이었다고 보고, 개화사상가에게 영향을 준 외국 서적들과 개화사상을 소개하였다. 개정·증보판에는 「이언(易言)과 한국의 개화사상」이 추가되었다. 청말 정관응(鄭觀應)이 저술한 『이언』이 개화사상에 미친 영향을 다룬 이 논문은 특히 『이언』이 한글로까지 번역, 출간되었다는 사실도 밝혔다.
개화운동에 관한 연구로는 온건개화파에 의해 박문국(博文局)에서 발간된 근대적인 신문에 대한 연구인 「한성순보(漢城旬報)와 한성주보(漢城周報)에 대한 일고찰」을 들 수 있다. 또 1886년 정부에서 세운 최초의 신식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대한 고찰인 「육영공원의 설치와 그 변천」, 1885년부터 1911년까지 영어·일어·한어(漢語)·법어(法語)·아어(俄語, 1904년 폐지)·덕어(德語) 등을 교수한 외국어학교에 관한 「한말의 관립외국어학교」가 포함된다.
아울러 「미국 군사교관의 초빙과 연무공원(鍊武公院)」에서는 미국인 군사교관에 의해 1888년부터 1894년까지 존속되었던 연무공원에 대한 연구와, 1883년 보빙사(報聘使)를 수행하여 미국에 간 최경석(崔景錫)이 1884년에 설립한 모범농장에 관한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의 설치에 대하여」라는 논문까지, 5편의 개화운동에 대한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들은 관립교육기관을 통한 서양 문화의 수용과, 농장을 통한 서양 기술의 수용 사례를 다룬 것들이다. 즉, 주로 정부와 온건파 개화사상가들에 의한 개화정책의 구체적인 사례연구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개화운동은 대체로 지속적이지는 못했던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그러한 움직임이 결국 한국에 개화사상을 보급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을 주로 서지적인 관심과 아울러 소개하였다. 「안종수(安宗洙)와 농정신편(農政新編)」·「이수정(李樹廷)의 인물과 그 활동」·「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에 대한 몇 가지 문제」·「미국유학 시절의 유길준(兪吉濬)」이 그것이다. 유길준을 제외하면, 개화사상가로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들을 소개한 이들 논문은 개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수원(隨員)이었던 안종수가 일본을 통해 근대적인 농업기술을 소개하였다는 사실이라든지, 수신사(修信使)를 따라 일본에 갔던 이수정이 개신교신자가 되어 성서번역에 참여한 사실이 이 논문들에 의해 밝혀졌다. 또, 개화당에 속한 박제형(朴齊炯)이 저술한 『근세조선정감』의 소개와 그에 관련된 문제나, 유길준의 미국 유학 시절의 여러 사실도 여기에서 밝혀졌다.
저자는 이 논저를 간행한 이후에도 꾸준히 개화파와 개화사상에 대한 관심을 보여, 1970년대에는 『개화당연구』(일조각, 1973)와 『한국개화사상연구』(일조각, 1979)라는 논저를, 1980년대에는 『한국개화사의 제문제』(일조각, 1986)와 『개화파와 개화사상연구』(일조각, 1988) 등의 연구서를 저술하였다.
이 논저는 한국 근대사에 있어 개항 이후의 한국 사회를 개화기라는 용어로 새롭게 부각시킨 역저이다. 개별적인 주제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연구, 근대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전초작업이기도 하였다. 이 연구에 힘입어 이후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수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논저는 1960년대 한국사 연구의 한 이정표가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