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유자(儒者)들이 지은 경기체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연대가 가장 오래인 작품으로, 제작 연대는 13∼14세기 주장도 있으나 믿기 어렵고, 학계 논의를 폭넓게 수용할 때 1216년(고종 3)∼1230년 사이로 추정된다. 경기체가는 <한림별곡>으로부터 발생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고려사≫ 권71 악지에는 “이 노래는 고종 때 한림의 여러 선비가 지은 바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작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장에 나오는 금의(琴儀) 문하의 유원순(兪元淳)·이인로(李仁老)·이공로(李公老)·이규보(李奎報)·진화(陳樺)·유충기(劉沖基)·민광균(閔光鈞)·김양경(金良鏡) 등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며, 이 작품은 여러 선비가 지었다는 기록과 모두 8장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한 사람이 한 장씩 돌아가며 지었다고 볼 수 있다. 주제는 작자층으로 보이는 신진사대부들의 득의에 찬 노래로 보고 있다.
가사의 형식을 보면 각 장은 앞 4구에 엽(葉) 2구가 붙은 6구형이고, 음수율은 제1·2구는 3·3·4, 제3구는 4·4·4(3·4장은 예외), 제5구는 4·4·4·4로 되어 있고, 제4구와 제6구는 ≪악장가사≫에 ‘위 시댱ㅅ경 긔 엇더ᄒᆞ니잇고’로 되어 있는 부분이 ≪고려사≫ 악지에는 ‘偉試場景何如(위시장경하여)’로만 적혀 있으나, ≪악장가사≫에 순수한 국어로 된 부분이 ≪고려사≫ 악지에는 ‘云云(운운)’이라 적고 주(註)에 “이어(俚語)임, 가사 중 이어로 된 곳은 다 이 같이 싣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고려사≫에 ‘偉試場景何如’로 적혀 있는 부분도 노래로 부를 때에는 ≪악장가사≫에 실린 바와 같이 불렀을 것이다. 또, ≪악장가사≫에 각 장 제5구는 모두 2음보의 말이 반복된 4음보로 되었는데 ≪고려사≫에는 반복의 표시가 없으나, 그것도 당시 노래로 부를 때에는 반복하였을 것이다.
<한림별곡>의 구조는 제1·2·3구과 제5구은 개별 사물을 열거하고, 제4구와 제6구는 그 앞의 내용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개별화의 원리와 포괄화의 원리가 두 번 반복하는 구조로 보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여덟 가지 경(景)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문인과 그들의 장기(長技), 2장은 서적, 3장은 서체와 명필, 4장은 술, 5장은 꽃, 6장은 악기와 그에 능한 사람들, 7장은 산과 누각, 8장은 그네로 1장 1경씩 읊었다.
제1장에서는 당시에 유명한 문인들과 그들이 각각 잘하는 글들을 나열하고, 위 시장(試場)의 경이 어떠하냐고 물은 다음에, 금의(琴儀)의 죽순 처럼 많은 제자, 나까지 모두 몇 분인가를 노래하였다. 제2장에서는 당시 문인들이 읽었던 책들을 열거한 다음에 그 경(景)과 역람(歷覽)의 경(景)이 어떠하냐고 노래하였다.
제3장에서는 서체(書體)와 붓의 종류를 열거한 다음에 붓을 찍는 경(景)과 오생(吳生)과 유생(劉生)의 주필(走筆)의 경(景)이 어떠하냐고 노래하였다. 제4장에서는 좋은 술의 종류를 열거하고 그 술을 좋은 잔에 부어 권하는 경(景)과 유령(劉伶)과 도잠(陶潛)이 취한 경(景)이 어떠하냐고 노래하였다.
제5장에서는 꽃들을 노래하고 그 간발(間發)의 경(景)과 합죽도화(合竹桃花)의 고운 두 분이 상영(相映)하는 경(景)이 어떠하냐고 노래하였다. 제6장에서는 악기와 그 악기의 역대 명인을 열거하고 그들이 밤을 보내는 경(景)을 노래하고 일지홍(一枝紅)이 빗긴 피리소리를 듣고 잠을 들리라 노래하였다.
제7장에서는 삼신산(三神山) 누각의 미인이 수놓은 휘장 안에서 주렴을 반쯤 걷고 오호(五湖)를 바라보는 경(景)이 어떠하냐고 묻고, 버드나무와 대나무가 자라는 정자 언덕에 지저귀는 꾀꼬리가 반갑다고 노래했다.
제8장에서는 당추자(唐楸子)나무와 조협(皁莢)나무에 그네를 매어 당기거라 말거라 내가 가논데 남이 갈세라 하면서 옥을 깎은 듯한 섬섬옥수의 두 손길에 손을 잡고 함께 노는 경(景)이 어떠하냐고 노래했다.
<한림별곡>의 형식이 이루어진 근원과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① ≪고려사≫ 악지에 실린 노래는 그것이 민간에서 발생한 가사라 할지라도 국가나 궁중의 주악가사(奏樂歌詞)였던 것만 실어 놓았다는 점에서, <한림별곡>도 고려 때 국가에서 외국 손님을 접대하던 잔치(宴享)나 놀이의 잔치 때 부르던 주악가사였을 것이다.
② 고대에는 가사를 먼저 지어놓고 그것을 작곡해서 부르기보다는 어떤 음악상 영향에서 어떠한 형식의 가요가 이루어지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므로, 이 작품 역시 당시 어떤 음악의 영향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③ 작자인 한림들은 유명한 한문학자였으므로 우리 민요보다는 지식층의 시가나 음악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본다.
④ 고려 제11대 문종 26년(1072) 이후에 송나라 음악인 포구락(抛毬樂)·구장기별기(九張機別技)가 들어왔고, 16대 예종 때에는 송나라 신악(新樂)과 대성악(大晟樂) 및 중국 교방악(敎坊樂)인 당악(唐樂)이 쏟아져 들어와 국가적인 음악은 거의 송악(宋樂)이었다는 점과, 조선시대의 속악인 치화평 삼기(致和平三機), 동동 만기(動動慢機), 정읍 만기(井邑慢機)와 중기(中機)·급기(急機), 처용 만기(處容慢機), 봉황음 중기(鳳凰吟中機)와 급기(急機) 등이 모두 우리 고유의 악곡이 아니라 송나라 구장기(九張機)의 음악계통이라는 점, 또 ≪고려사≫ 악지 당악조에 실린 50여 편의 가사가 모두 중국시가의 한 형식인 사(詞)라는 점이다.
⑤ 이 노래가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들어 있는바, ‘속악’이라는 것은 우리의 고유음악이라는 말이 아니라 외국악곡의 변주곡(變奏曲)이거나, 또는 악곡은 외국 악곡 계통이지만 가사가 우리말로 된 것, 또는 외국음악이 우리에게 들어와 오랫동안 관습화한 것을 일컫는다고 보는 것이다.
⑥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원가사가 실린 것은 <풍입송 風入松>·<야심사 夜深詞>·<한림별곡>·<자하동 紫霞洞>의 네 노래뿐인데, 그 중 <풍입송>은 ≪시용향악보≫에 실린 악보에 의하면 제2장 재1·2구의 악곡이 제1장 제1·2구와 다르니 그것은 사악(詞樂)의 특색인 환두식(換頭式)이고, 또 제2·3장의 제3·4·5·6구 악곡은 제1장 제3·4·5·6구의 악곡과 같으니 그것은 사악의 환입식(還入式)이므로 그 음악이 사악 계통인 데 비하여 가사는 사(詞)가 아니기 때문에 속악에 들었고, <야심사>·<자하동>은 가사는 사(詞) 계통이나 창법이 사악 그대로가 아니므로 속악에 들었다.
그런데 <풍입송>·<야심사>가 모두 음악상 단락은 매 구(句) 3음보 진행으로 <한림별곡>의 각 절 전강(前腔) 4구와 일치한다. 따라서 <풍입송>·<야심사>·<자하동>이 사악 계통이라는 점에서 <한림별곡>도 사악 계통으로 보아야 한다.
⑦ 각 장 제4·6구에는 거의 ‘∼경’이라는 말이 끼었는데 <한림별곡> 이전의 시가 중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고, ≪고려사≫ 악지 당악조(唐樂條)에 실린 사악 가사인 <헌선도 獻仙桃>의 금잔자(金盞子) 중에 ‘봉래궁전신선경(蓬萊宮殿神仙景)’, ‘월화청(月華淸)의 공대경(空對景)’, ‘석노교(惜奴嬌)의 성경(聖景)’, ‘전화지령(傳花枝令)의 우양신당미경(遇良辰當美景)’, ‘경배악(傾盃樂)의 변소경(變韶景)’, ‘영춘악(迎春樂)의 신주여경(神州麗景)’ 등이 보여 <한림별곡>의 ‘∼경’도 그 영향이라고 보아야 한다.
⑧ 제8장의 ‘당당당 당추자’와 같은 음조도 이전의 다른 시가에서는 볼 수 없는데, 송나라 육유(陸游)의 사(詞)인 <채두봉 釵頭鳳>에 “동풍오 환정박 일회수서 기년이색 착착착(東風惡歡情薄一懷愁緖幾年離索錯錯錯)…… 도화락 한지각 산맹수재 금서난탁 막막막(桃花落閒池閣山盟雖在錦書難託莫莫莫)” 등과 같은 것이 있다.
⑨ 제6장에 나오는 ‘해금·장고’는 송나라 음악이 들어온 뒤부터 쓰인 악기이다.
⑩ 제6장에 나오는 ‘대어향(帶御香)’도 ≪고려사≫ 악지 당악조의 첫 노래인 <헌선도>에서 항시 듣던 ‘화기인온대어향(和氣氤氳帶御香)’에서 끌어들인 것이다.
⑪ 3·3·4, 4·4·4조는 사(詞)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조이다.
⑫ 사악(詞樂) 가사에는 미전사(尾前詞)와 미후사(尾後詞)로 나뉜 것이 많은데, <한림별곡>이 앞 4구에 엽(葉) 2구로 되어 있는 것은 사(詞)와 상통하는 점이다.
이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사악의 영향에서 이루어진 노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래를 빚어낸 동기는 작자들의 풍류적이고 유흥적인 성격도 곁들었지만, 또 그들이 아무리 큰 한문학자라 할지라도 사(詞)로 된 당악가사는 흥취가 적고, 또 음악면에 있어서도 당악보다는 전부터 몸에 익은 속악의 선율에 애착되어 절충적인 변형가사와 변주곡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림별곡>이 그 뒤 시가의 한 유형으로 고정된 것도 가사 속에 나오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이 노래로 불리는 데 흥미를 느끼고, 선망적(羨望的)인 내용에다가 읊을 때 ‘위’와 같이 기세를 돋우거나 ‘당당당 당추자’와 같은 음조가 흥을 돋우어 그 시대의 지식인들에 널리 유행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별곡’이라는 말은 사(詞)의 변형이나 변주곡에서 붙은 명칭으로, <청산별곡>·<서경별곡> 등의 악곡이 고유한 우리의 악곡이 아니므로 ‘별곡’이라 한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