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징(仲澄), 호는 만은(漫隱). 할아버지는 증이조참판 한의(韓檥)이고, 아버지는 참판 한형길(韓亨吉)이며, 어머니는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허후(許厚)와 허목(許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과거를 버리고 뜻을 경전(經傳)에 두었으며, 특히 『중용』을 중히 여겨 공부에 전력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효행으로써 그를 조정에 천거하여 선릉참봉(宣陵參奉)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75년(숙종 1) 이후 권고를 받고 남대(南臺: 학행이 뛰어나 사헌부의 지평(持平)이나 장령(掌令)에 추천된 인물)에 들어갔다. 1679년 다시 지평·장령·집의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동안 특별한 유시가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정사(政事)에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에 명성이 높아 경신변국 이후 정승 김수흥(金壽興)·이후정(李后定) 등의 추천을 받는 등 자주 천거되었다.
그의 논의와 씩씩한 기상은 소인배가 흉내낼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따라서 1685년부터 1687년까지 집의를 제수한 것이 무려 여섯 차례나 되었지만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문인(門人)이었던 감사 권흠(權欽)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는 사화(士禍)가 많아 유술(儒術)에 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단지 학문이 아직 미숙한데 이름을 먼저 내세우려는 데 있다. 덕(德)을 미처 쌓지 못한 채 책임이 과중하니 행동이 꺾이고 발목잡힐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데 물들 수밖에 없으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지금은 당론이 셋으로 나뉘어 예론(禮論)이 대단히 심하다. 필시 사람을 해치는 계략에 빠지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젊었을 때 당(堂)을 일휴(日休)라고 불렀으나, 허목이 서신을 보낼 때 지칭한 만은(晩隱)을 호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