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중국 톈진 난카이[南開]대학에 재학중인 신명화(申命和)와 12명의 한인 학생들은 '학생회(學生會)'를 결성하였다. 학생회 회장은 당시 기숙사 사감이던 박용태(朴龍泰)였다. 박용태는 리위안훙[黎元洪] 등 중국 유력인사들과의 교류에서 얻은 경제적 원조로 한인 학생들을 지원하면서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박용태와 학생들의 오해로 학생회가 부진에 빠지자,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오인석(吳仁錫)을 파견하였다. 오인석은 박용태와 함께 기존의 학생회를 비롯한 한인들을 규합하여 1921년 민단(民團)을 조직하였다.
민단은 1921년 3월 1일에 3 · 1운동 기념식을 개최하였는데, 기념식 개최 이후 박용태 · 유갑년 · 박세훈 등 주요 인물들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용태가 체포되던 3월 26일 한혈단이 결성되었다.
단장 김철, 의사장 김충일(金忠一), 총무 김위택(金偉宅), 서무 김세창(金世昌), 외무 김기호(金基湖) · 이석일(李錫一), 재무 장제동(張濟東), 직집부장(織輯部長) 김정(金政), 교통 백형원(白亨元) · 남국방(南國芳) · 신현재(申賢哉), 서기 겸 편집원 박일경(朴一擎), 의사원(議事員) 이치겸(李致謙) 등이 선임되었다. 김위택과 박일경은 흥사단 단원이고, 김응순 · 김정 · 김위택 · 박일경 등은 평안도 출신으로 안창호(安昌浩)와 관계가 있었다.
결성 4개월만인 1921년 7월 18일 조직을 개편하고, 이름을 한민회(韓民會)로 변경하였다. 조직 구성에서는 편집부를 선전부로, 교통부를 교통부장과 교통부원으로 분리하였을 뿐 한혈단과 차이가 없었다. 한혈단의 개편은 박용태의 피체(被逮)와 오인석의 임시정부 활동으로 인해서 활동이 어려워진 민단의 역할을 한혈단이 포괄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민회는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톈진에서 독자적 활동을 하던 남정각(南廷珏)과 협의를 통하여 대한회복충의열사단(大韓回復忠義烈士團)으로 합병,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