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전설에 속한다. 미수(眉叟)는 허목의 호이다. 허목은 남인에 속하는 인물로, 서인이던 송시열(宋時烈)과의 사이에 벌어진 예론(禮論) 관련 논쟁이 유명하다.
특히 허목은 허적(許積)과 함께 남인을 영도하여 송시열을 공격하였는데, 허목은 과격론의 입장을 띤 데 반해 허적은 온건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사이가 벌어졌다.
또한, 1678년(숙종 4)에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어 당시 우의정이던 허적의 실정과 그의 아들 허견(許堅)의 죄상을 논핵하여 왕의 노여움을 샀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허목과 허적 사이의 갈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 만하다. 이를 계기로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허목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저작에 몰두하였다.
「허미수설화」 가운데에는 그의 이인적(異人的) 풍모를 강조하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허적의 출생담과 관련된 것으로 ‘허적과 허목’ 이야기가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미수와 허적의 아버지가 절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절에서는 매월 보름이면 중이 하나씩 없어졌다. 허적의 아버지가 살펴보니 이무기가 나타나 중을 잡아먹기 때문이었다.
허적의 아버지가 이무기를 칼로 죽이자, 이무기의 기운인 파란 줄기가 그의 집으로 뻗쳤다. 허미수는 그것이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판단하여 그 집에서 아들을 낳는 족족 없애도록 충고했다. 허적의 아버지는 그의 충고를 따라 두 아이를 없앴다.
셋째 아이를 낳자, 허미수는 그 아이마저 허가(許家)의 멸족을 초래할 것이라 하여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허적의 아버지는 더는 죽일 수 없노라며 아이를 살려두었다. 이에 허미수는 그 아이로 인한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미리 알고 형제간에 파적(破籍)하였다고 한다.
허적은 아주 뛰어난 신동이었으나 결국 역적이 되어 가문에 화를 입혔다. 이 설화는 허미수의 선견지명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허목과 허적 사이의 정치적 싸움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허목의 이인적 기질을 보여 주는 설화로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