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전설에 속한다. 그는 내외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조선 개국 초기의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힘썼다. 이렇다할 정적(政敵)도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정치활동을 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며, 특히 청백리(淸白吏)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다.
「황희정승설화」는 「황희정승 이야기」·「계란유골」·「개가법 고치고 원망 산 황희」·「이인 황희정승」·「황희정승 탄생일화」·「황희정승과 딸」·「명판결을 내린 황희」·「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황희정승의 판결」 등 아주 다양한 내용이 있다.
대체로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결국은 탈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고 있다는 노장적(老莊的) 사고방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삽화가 많다. 또한, 그의 장례에는 딸들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어서 찢어 나누어 입었다는 이야기 등 그의 청빈한 생활태도가 벼슬아치로서의 한 규범을 보여준다는 점을 강조한 삽화가 많이 있다.
황희의 청백리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는 설화로는 「청백리 황희정승과 박광대」가 흥미롭다. 황희가 정승으로 살았으면서도 가난하게 살다 죽게 되자 여러 딸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방책을 마련해달라고 한다. 이에 “공작이 날거미줄 먹고 사나, 남산 밑에 박광대가 하리라.”고 유언한다.
그 뒤 중국에서 공작이 날아오자 황희의 지략이 생각나서 그 딸들에게 물으니, 그 유언을 말하므로 공작에게 날거미줄을 먹여 살찌워 중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로 황희의 가난한 처지가 밝혀져 어느 대감이 황희의 집에 달걀을 여러 수레 보냈다. 그런데 그 달걀에는 뼈가 있었다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