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허안(許安). 아버지는 충주사록(忠州司錄) 허연(許延)이다. 아들은 허영(許榮)이다.
1263년(원종 4)에 김구(金坵) 등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충렬왕(忠烈王) 총신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되어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국학사예(國學司藝),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감찰대부(監察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등을 거쳤다. 1307년(충렬왕 33)에는 과거를 주관하여 안분(安奮)과 안축(安軸)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충선왕(忠宣王)이 그에게 시무에 관해 직언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1303년(충렬왕 복위 5)에는 여러 대신들이 세자를 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유전은 박경량(朴景亮)· 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세자의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 때문에 1308년(충렬왕 복위 10, 충선왕 복위년)에 충선왕이 복위한 후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었다.
이 무렵 상왕(上王)이었던 충선왕은 원(元)나라 티베트로 유배되어 있었다. 충선왕은 고려에 글을 보내 허유전 등에게 자신의 구명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허유전은 1323년(충숙왕 10)에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김거(金䝻)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다. 이들은 반 년 이상 대도(大都)에 머물렀으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