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전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 밀직사사 · 수첨의찬성사 · 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초명
허안(許安)
봉호
가락군(駕洛君),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
시호
충목(忠穆)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243년(고종 30)
사망 연도
1323년(충숙왕 10)
본관
김해(金海)
주요 관직
밀직사사, 수첨의찬성사, 정승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허유전은 고려 후기에 밀직사사, 수첨의찬성사, 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263년(원종 4) 김구가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고, 충렬왕 말에 재추에 올랐으며, 세자(훗날의 충선왕)를 폐하려는 조정 대신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세자의 지위를 보전하였다. 충숙왕 대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최고위직인 정승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티베트로 유배 간 충선왕의 귀환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심양왕과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의
고려 후기, 밀직사사 · 수첨의찬성사 · 정승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허안(許安). 아버지는 충주사록(忠州司錄) 허연(許延)이다. 아들은 허영(許榮)이다.

주요 활동

1263년(원종 4)에 김구(金坵) 등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하였다.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충렬왕(忠烈王) 총신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되어 죽임을 당할 뻔하였으나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국학사예(國學司藝),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 감찰대부(監察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 등을 거쳤다. 1307년(충렬왕 33)에는 과거를 주관하여 안분(安奮)과 안축(安軸)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1298년(충선왕 즉위년)에는 충선왕(忠宣王)이 그에게 시무에 관해 직언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1303년(충렬왕 복위 5)에는 여러 대신들이 세자를 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허유전은 박경량(朴景亮)· 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세자의 지위를 보전하였다. 이 때문에 1308년(충렬왕 복위 10, 충선왕 복위년)에 충선왕이 복위한 후 교서를 내려 포상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충숙왕 8)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政丞)이 되었다.

이 무렵 상왕(上王)이었던 충선왕은 원(元)나라 티베트로 유배되어 있었다. 충선왕은 고려에 글을 보내 허유전 등에게 자신의 구명을 위해 힘써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허유전은 1323년(충숙왕 10)에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김거(金䝻)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다. 이들은 반 년 이상 대도(大都)에 머물렀으나, 심양왕(瀋陽王) 왕고(王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광철, 『원간섭기 고려의 측근정치와 개혁정치』 (경인문화사, 2018)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 연구』 (일지사, 1990)
이명미, 『13~14세기 고려·몽골 관계 연구』 (혜안, 2016)
관련 미디어 (1)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