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왕선(王瑄, 王宣), 아버지는 초군노(抄軍奴: 초군은 각도의 주진(州鎭)에 두었던 군대의 하나이며 초군노는 여기에 속한 관노)인 박녹대(朴祿大)이며, 충선왕비인 조비(趙妃)의 매서(妹壻)이다.
충선왕이 즉위하자, 1303년(충렬왕 29) 앞서 충선왕이 모함을 받았을 때 이를 저지한 공으로 특별히 등용되었고, 이때 일가친척까지 모두 양민이 되었다.
한국공주(韓國公主: 薊國大長公主)가 조비를 질투, 원나라에 모함함으로써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조비를 징계할 때 함께 원나라에 잡혀가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뒤에 원나라에서 돌아와 군부판서(軍簿判書)·밀직부사가 되었다.
1310년 (충선왕 2) 첨의평리(僉議評理)로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 이때 충선왕은 원나라에 있으면서 전지(傳旨)로 정치를 하였는데, 당시 연경(燕京)에 있던 김심(金深)·이사온(李思溫) 등이, 왕이 오랫동안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것은 박경량·최성지(崔誠之)·권한공(權漢功) 등의 심복 때문이라고 휘정원(徽政院)에 무고하여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충선왕 때 부춘군(富春君)에 봉하여졌고, 충숙왕 때 다시 흥례군(興禮君)에 봉하여졌다. 1320년(충숙왕 7) 상왕(上王: 충선왕)이 강남(江南)에 귀양가게 되자 수안군(遂安君) 이연송(李連松) 등과 함께 시종하였다.
일행이 금산사(金山寺)에 이르렀을 때 항상 충선왕을 모함하던 빠이앤투구스[伯顔禿古思]의 간계로 뒤쫓아 온 원나라 황제의 사자에 의하여 왕이 다시 소환되었다. 이 때에 충선왕이 무사하지 못할 것을 예측하고 시종하던 대부분의 신하들이 도망쳐버리자 박경량은 이연송과 함께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