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포전투 ()

고려시대사
사건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
이칭
이칭
남해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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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
내용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 같이 통쾌한 것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 나세(羅世) 등의 진포대첩(鎭浦大捷),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꺾은 싸움이었다. 이 전투 이후 고려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 입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축산도에 선졸(船卒)을 두는데 성공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후기 왜구와 해양방어대책」(이재범, 『이순신연구논총』13, 2010)
「고려말 정지와 최무선의 남해 관음포대첩」(정의연,『慶南鄕土史論叢』Ⅵ,1997
「홍건적과 왜구」(나종우, 『신편한국사』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고려말기(高麗末期)의 왜구(倭寇)」(손홍렬, 『사학지(史學志)』9,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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