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본. 주로 한문으로 쓰였으며 간혹 국문이 혼용되었다. 규장각에 있다.
일종의 궁중 행정일기로, 1764년(영조 40) 1월 1일부터 1765년 12월 13일까지 2년분을 수록하고 있다. 전 세자빈 혜빈홍씨가 거처하던 본궁 및 그 소속이던 용동궁(龍洞宮)의 업무일지를 대개 당번 내관이 기록하였다.
혜빈은 사도세자의 빈궁 홍씨이며, 영조의 며느리이자 정조의 어머니이다. 임오화변(영조 38년 윤5월 세자가 뒤주에 갇혀 살해된 사건) 이후 영조가 내려준 칭호로, 뒤에 정조가 즉위하자 혜경궁(惠慶宮)이라 높였다.
각 전궁(殿宮)에는 내외에서 각각 기록하는 일기가 있는데 이것은 남성이 기록한 외정(外廷)의 일기이다. 그 내역은 그날 있었던 일의 보고와 안건에 대하여 글이나 말로 여쭈어 올린 것들과 그에 대한 답이 주가 된다.
예시하면, 첫째 문안관계이다. 문안 든 사람을 기록하는데 개인이 아니라 부처명으로 쓴다. 예컨대, ‘정원(政院)·옥당(玉堂)’ 등으로 표기한다. 문안 보낸 사람 역시 ‘대전·웃전(대비전)·××궁’이라 쓴다.
둘째, 그날 들어온 물품의 내역을 기록한다. 예컨대, “내수사에서 찹쌀 몇 가마, 소금 몇 섬 들여옴” 등과 같이 적는다.
셋째, 상을 주는 격식 관계를 기록한다. 아랫사람(주로 내관·의관·별감)에게 상으로 내린 물품을 기록하는 것인데, 그 종류가 다채롭다. 장작·숯·무명·명주·달력·버선감·주머니에서부터 팥죽·꿀 등이 있다.
넷째, 품의관계(稟議關係)를 기록하는데 그 중에서 주로 인사관계(人事關係)를 기록한다. 예컨대, “∼옹주 출궁시에 어느 내관을 배행시키면 좋겠습니까?” 등이다. 답은 일방적 보고의 경우에는 ‘알았다(知道), 알쾌라’의 두 종류이다. 인선(人選)의 경우에는 “누구누구를 보내라.”고 지적한다.
다섯째, 징계(懲戒)에 대한 것을 기록한다. “누구누구가 이런 부당한 일을 저질렀는바 어찌하오리까.” 하는 품의에 태장(笞杖) 몇을 치라든지, 쫓아내라든지 하는 것을 지시한다.
「혜빈궁일기」는 순전히 행정일기이기 때문에 문학성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궁중생활의 풍속의 일면을 알 수 있고 궁중용어를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