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정여(定汝).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현보(洪鉉輔)이며, 어머니는 이세한(李世漢)의 딸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동생이다.
1753년(영조 29)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정언을 지내고, 이듬해 교리로 조영순(趙榮順)을 구제하려다 파직되었다. 1755년 헌납을 거쳐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승진하였으며, 그 뒤 승지·한성부우윤·대사헌을 지냈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가 되어 유민(流民)을 위무하여 정착하게 하였다.
그 뒤 호조·예조·이조·형조의 참판을 거쳐 도승지·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공조·이조·병조·호조·예조의 판서를 거쳐 1774년 우의정, 1775년 좌의정이 되었다.
세손(뒤에 정조)의 외종조부가 되는 것을 미끼로 안으로는 정후겸(鄭厚謙) 모자와 밖으로는 윤양후(尹養厚)·홍지해(洪趾海) 등과 결탁하여 위세를 부렸으며, 동궁의 보호를 내세워 군신의 예에서 벗어난 일을 자주하여 동궁의 미움을 받았다.
그리하여 세손과 사이가 나빠지자 다른 풍산홍씨들이 시파에 가담하여 세손을 보호하였으나 그는 벽파에 가담하여 세손의 즉위를 반대하였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여산(礪山)에 유배되었다가, 고금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곧 사사(賜死)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