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대전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에 있는 석기시대 화덕자리 · 석기류 · 토기류 · 목탄 등이 출토된 집터.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사평면에 있는 석기시대 화덕자리 · 석기류 · 토기류 · 목탄 등이 출토된 집터.
개설

주암댐 수몰지구 문화유적 발굴조사의 일환으로 1987년과 1989년에 3차에 걸쳐 충북대학교 발굴팀이 조사하였다. 발굴 조사된 유적은 해발 112∼113.5m에 걸쳐 있으며, 주위에는 대나무·굴참나무·잡목들이 많이 우거져 있었다.

유적 주위에는 고기편마암류(古期片麻岩類)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특히, 고기편마암 중에서도 화강암화작용의 차이에 의해 형성되는 화강암질 편마암이 전지역을 덮고 있다. 대전 유적의 북쪽과 서쪽은 백악기의 경상계에 속하는 변성석영반암, 고생대 평안계에 속하는 오산리층, 하천의 하상을 따라 제4기의 충적층이 복잡한 분포형태로 나타난다.

발굴 결과, 고인돌문화층(Ⅵ)·중석기문화층(Vb)·후기 구석기문화층(Va) 및 중기 구석기문화층(Ⅳa)이 확인되었다.

내용

고인돌은 덮개돌이 있는 것 26기, 덮개돌이 없이 땅 밑에 무덤방만이 있는 것 5기로 모두 31기가 발굴되었다. 고인돌문화층의 문화상을 덮개돌·무덤방·뚜껑돌·묻기방법·껴묻거리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덮개돌이 자리한 모습은 유적의 앞을 흐르는 동복천의 강물흐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밝혀지고 있어 물을 통한 영생의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덮개돌의 재료는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변성암류의 화강암질 편마암이며, 크기는 100∼200㎝ 사이가 많고, 길이에 비해 너비가 큰 편이다. 형식은 바둑판식과 구덩이식이 함께 있지만 구덩이식이 더 많다.

무덤방은 대체로 강물의 흐름과 나란히 한 것이 많고 강돌과 막돌로 돌덧널을 만들었다. 특히, 제30·37호 고인돌의 무덤방에서 보이는 손질된 강돌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수평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뚜껑돌이 있는 것은 14기나 된다. 제33·37호는 이중으로 뚜껑돌이 되어 있고, 바닥은 흙바닥과 납작한 돌을 부분적으로 깐 것으로 보아 배수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묻는 방법은 바로 펴묻기와 굽혀 묻기가 같이 사용되었다. 묻힌 사람의 머리방향은 강물의 흐름과 나란한 것과 바라보는 것이 있으며 머리쪽에는 베개돌이 있었다.

껴묻거리는 석기와 부서진 토기가 있다. 의식적인 유물로는 구멍뚫린 돌·눈돌·X자 새긴 돌 등 장례의식과 관련된 유물이 나와 당시 사람들의 믿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다른 유적과의 비교연구가 기대된다.

이러한 점으로 살펴보아 대전 고인돌 유적이 만들어진 연대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설정해놓은 전라남도지역의 고인돌 연대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중석기문화층(Vb)은 석기의 크기가 작아지며, 대개의 것이 조합식 도구로 사용하기에 알맞은 것들로 볼 수 있다.

후기 구석기문화층 (Va)은 앞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결과가 나오면 보다 정확한 절대연대를 세울 수 있겠지만, 출토된 석기 중에는 연대와 문화성격을 뚜렷하게 밝힐 수 있는 배모양·쐐기모양의 좀돌날몸돌(micro-bladecore)석기가 있었다.

좀돌날몸돌석기의 연대는 동북아시아에서 2만∼1만 1000년 사이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수양개 유적의 절대연대가 약 1만 7000년 전후한 것임을 감안할 때, 이 유적의 연대는 좀돌날몸돌석기의 제작기술과 방법으로 보아 그보다 조금 늦은 1만 5000년 전후로 볼 수 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주거형태를 알 수 있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집터 기둥구멍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이 집터 옆에서 2개의 화덕자리 및 강자갈을 깐 네모꼴의 구조물이 확인되었다. 앞으로 공주 석장리, 제원 창내 유적의 집자리(막터)와의 비교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중기 구석기문화층(Ⅳa)의 대표적 유물은 석기제작을 알 수 있는 몸돌·격지를 비롯해 밀개·긁개·찍개·찌르개 등이 출토되었다. 이 문화층의 연대는 퇴적된 층위의 구성입자 및 구성물질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추정해볼 때, 뷔름 Ⅰ·Ⅱ빙온기로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화순대전유적에서의 중기 구석기문화층 확인은 당시 사람들이 좋은 환경을 갖춘 호남지방에서 중기 구석기의 이른 시기부터 삶을 꾸려나갔음을 뜻한다. 더불어 호남지방 역사의 상한을 중기 구석기까지 끌어올리는 뚜렷한 구석기문화의 한 형태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기 구석기-후기 구석기-중석기 사람들의 행동의 폭이 섬진강의 한 갈래인 보성강가에 위치한 여러 구석기 유적과 문화적 연관성을 많이 가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유적의 후기 구석기문화층과 승주 금평, 승주 죽산, 승주 곡천 유적의 후기 구석기문화층에서 좀돌날몸돌석기가 출토된 점, 중기 구석기층의 석기양상과 승주 곡천 유적의 중기 구석기층의 양상이 비슷한 점, 섬진강가에 위치한 유적간에 석기재료의 이용과 석기제작기술이 유사한 점 등에 대한 비교연구로 유적의 성격이 보다 뚜렷해지길 기대한다.

참고문헌

『화순 대전 구석기시대 집터 복원』(이융조·윤용현,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 1992)
집필자
이융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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