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종의 왕망전(王莽錢) 중 하나이다. 『한서』 식화지(食貨志)에는 천봉원년(天鳳元年 : 서기 14)에 화포(貨布)와 함께 처음으로 주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서』 왕망전에는 지황원년(地皇元年 : 서기 20)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원전(圓錢)의 형태로 내부에 네모난 구멍〔方孔〕이 있고 구멍의 오른쪽에 화(貨)자, 왼쪽에 천(泉)자가 배치되어 있다. 크기는 오수전(五銖錢)보다 약간 작은 지름 1촌(약 2.25㎝)이며, 무게는 5수(銖: 5수는 약 3.19g)이다.
왕망대에는 10여 년(서기 7∼23)의 짧은 기간동안에 전후 4차례의 폐제개혁(幣制改革)이 단행되어 모두 37종의 화폐가 주조·발행되었다.
제1차 폐제개혁 때에는 거섭(居攝) 2년(서기 7)에 대천오십(大泉五十)·착도(錯刀)·계도(契刀) 등을 주조해 전대(前代)의 오수와 병용하였다. 제2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원년(始建國元年 : 9)에 대천오십만을 남기고 도폐류(刀幣類) 및 오수를 폐지하였고, 따로 소천직일(小泉直一)을 발행하였다.
제3차 개혁 때에는 시건국 2년(10)에 보화제(寶貨制)를 채용했으며, 대포황천(大布黃千) 등의 포화십품(布貨十品) 등을 주조하였다. 마지막 제4차 개혁 때에는 천풍원년(天風元年 : 서기 14)에 새로이 화천과 화포를 주조하였다.
왕망전의 특징은 주조기술이 정교하고 미려하며 동질(銅質)이 양호한 점이다. 유통연대는 후한 광무화건무16년(後漢光武華建武十六年 : 서기 40)에 다시 오수전이 부활할 때까지가 정식으로 유통된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상당기간 비교적 많이 통용된 것으로 보고 있다.
왕망전 중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화천·화포·대천오십·소천직일 등이 있다. 이 중 화천이 출토된 유적의 예로는 채협총(彩篋塚)·정백리 1호분 등과 낙랑토성지를 들 수 있다. 남쪽으로는 제주도 산지항(山地港)과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특히, 제주도 산지항에서는 오수전을 비롯해 화천 11점이 화포와 대천오십 등의 다른 종류의 왕망전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렇게 한 유적에서 다른 유물과 함께 화천과 같이 정확한 주조연대를 알 수 있는 화폐류가 출토되는 경우, 그 유적의 연대를 추정할 수 있고 당시 중국과 한반도가 하나의 교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