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 중순 북한은 군 초급 간부(소대장) 양성기관으로 보안간부학교를 설립하여 전술, 포병, 사격, 통신의 4개 학부를 편성하여 교육하였다. 학교 창설 후 4개월간은 교관 교육을 먼저 실시하였고, 1946년 10월 22일 보안간부 제1기생 300명을 입교시켜 교육하였다. 제1기생의 교육기간은 1년으로 1947년 10월 26일 졸업하였는데, 졸업 시 대부분 본교의 교관 및 소대장(일부 우수자는 중대장)으로 잔류, 보직되었으며, 6.25전쟁을 치른 인민군 장교의 대부분이 이 학교 졸업생들이었다.
북한은 정치 간부 양성기관으로 평양학원을 발족시킨 후 5개월여 만인 1946년 7월 8일 ‘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평양학원 군사반과 보안간부훈련소를 통합하여 군 초급간부(소대장) 양성기관으로 강서군 성암면 대안리 지역의 대안전기공장 합숙시설에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여 보병, 포병, 통신병, 공병을 비롯한 여러 병종의 지휘관들을 전문적으로 키우기 위하여 창설하였다.
제1기생의 교육기간은 1년으로 1947년 10월 26일 졸업하였는데 졸업 시 대부분 본교의 교관 및 소대장(일부 우수자는 중대장)으로 잔류, 보직되었다. 제1기생이 졸업 후 학교는 확장되어 종합군관학교로 발전하였고, 1948년 12월 초순평양의 사동으로 학교를 이전하여 ‘제1군관학교’로 개칭했다. 이 학교를 졸업한 간부(장교)들이 인민군 확장 시 주요 간부로 보직되었다.
중앙보안간부학교는 스티코프스티코프의 계획 하에 스탈린이 승인함으로써 구체화된 것이었다. 이 학교는 창설 후 4개월간은 이곳에 보직된 교관들에 대한 교관 교육을 먼저 실시하고, 교육훈련 준비가 완료된 1946년 10월 22일 보안간부 제2기생 300명을 입교시켰다. 이들 제1기생의 학생은 3개 중대로 편성하였는데 제1중대는 보병중대, 제2중대는 포병중대로 각각 120명으로 구성되었고, 제3중대는 60명으로 구성한 통신 중대였다. 학생들에게 실시한 교육훈련 중 전술훈련은 소련 고문관의 지도를 받아 소련군 출신 교관들에 의하여 소총소대로부터 연대에 이르기까지 실시되었다. 제1기생의 교육기간은 1년으로 1947년 10월 26일 졸업하였는데 졸업 시 대부분 본교의 교관 및 소대장(일부 우수자는 중대장)으로 잔류, 보직되었다.
학교편성 작업에는 김일성의 직계인 항일유격대 출신과 손종준, 최병열, 김준동, 박승철 중국 연안파 출신 박효삼(朴孝三) 등 김강 30여명, 그리고 평양학원 단기과정 출신 10여명이 주축이 되었다. 학교 편성은 학교장 아래 군사 및 정치 부교장 그리고 전술, 포병, 사격, 통신의 4개 학부를 두었다.
학교장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정치 부교장은 김웅, 군사부교장은 최용진이 보임되었다. 전술학부장에는 박성철, 포병학부장은 전학준, 사격학부장은 박길남, 통신학부장은 이종인 등이 각각 임명되었고 그 외 지휘관으로 이두익, 최병열, 오찬복 등이 임명되었다. 소련군사고문은 스베레주크스베레주크 소좌였다.
이 학교는 500명 정원에 수업기한은 12개월이었다. 입학 자격은 각급 인민위원회의 추천을 받은 신체 건강한 30세 이하의 자로서 중등학교 1학년 수료 이상의 학력으로 제한하였다.
1947년 5월 27일 북한군 계급 수여식과 인민집단군 편성 직후 동 학교의 간부들은 인민집단군 사령부의 각 기관장으로 보직되고 그 후임으로는 제1기생 출신들이 소대장, 중대장, 교관 등에 임명되었다. 1948년 12월 초순경, 중앙보안간부학교가 평양으로 이동하면서 정식으로 제1군관학교로 개칭되었는데 이미 이때는 북한군 창설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후였다.
북한은 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면서 북한군에 필요한 각종 병과를 증설한 종합군관학교로서 보병과를 중심으로 포병, 공병, 중기병, 통신, 경리, 군의, 군악 병과까지 양성하였다. 특히 포병부에서는 1949년 3월경에 소련제 122㎜ 포가 도입된 후부터는 본격적인 포술훈련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시범사격은 비단 포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과별로 졸업기를 앞두고 실시되어 그들의 실력을 과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제1군관학교는 약 2년이라는 기간 내에 양적으로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