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일본 도쿄에 유학하였다.
유학 중이던 1942년 7월, 도쿄에서 동지 박오훈(朴五勳)·최수일(崔秀逸) 등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朝鮮獨立靑年團)을 조직하고, 이 단체의 재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은 수차례의 회합을 거듭하여 우선 학병 및 지원병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기로 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일본경찰에 탐지되어 손시헌 등은 1943년 7월초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경상남도 거제포로수용소에서 영어 통역장교 생활을 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교육계에 투신해 부산중학교, 동래고등학교, 부산남고등학교 등 부산지역에서 30여 년간 영어교사를 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공훈으로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으며, 사후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