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수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인 연구회에서 활동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힘쓴 교육자 ·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2년
사망 연도
2003년
출생지
충청북도 영동
관련 사건
항일결사 연구회 독립운동
정의
일제강점기 때,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인 연구회에서 활동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힘쓴 교육자 · 독립운동가.
개설

충청북도 영동 출신으로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2월에 항일결사연구회(硏究會)에 가입하여 정치경제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연구회는 1941년 1월에 임굉(林宏)ㆍ이태길(李泰吉)ㆍ장세파(張世播) 등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민족의식 앙양과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여 각기 전문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항일결사연구회는 비밀을 엄수하고 매월 10일 연구발표와 하급생지도 및 동지포섭 등에 관한 방침을 정하고, 1941년 2월부터 같은 해 3월 17일까지 6회의 모임을 가졌다. 오용수는 3회 모임부터 참가하였다. 이후 대부분의 회원이 졸업을 하게 되자 동회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즉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 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우송방법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기로 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오용수는 1941년 3월에 동교 졸업 후 충북 영동군 황간의 남성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앙양시키며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경찰의 손으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의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오용수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으며,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971)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971)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문화일보』(2003.3.4)
집필자
정진각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