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남의는 충청남도 예산 출생으로, 본명은 윤영석(尹永錫), 호는 죽파(竹坡),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친동생이다. 윤남의는 1926년 10월부터 예산지역에서 윤봉길이 조직한 각곡독서회(角谷讀書會)에 가입하고, 농촌계몽운동에 적극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28일에는 일본침략정책을 풍자한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하였고, 4월 8일에는 윤봉길이 야학생 중심으로 조직한 월진회(月進會)에 가입하여 농촌개혁운동과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는 1930년 3월 15일 윤봉길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로는 월진회를 이끌며, 토론회와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윤남의는 윤봉길이 보낸 편지를 읽은 뒤 거사를 짐작하고 윤봉길이 직접 쓴 「농민독본(農民讀本)」·「기사년일기(己巳年日記)」·「월진회취지서(月進會趣旨書)」 등을 천장 속에 몰래 보관하였다. 이 자료는 윤봉길의 다른 유품 68점과 함께 1972년 보물로 일괄 지정되었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뒤 윤남의는 동료들과 함께 윤의사의 유해를 몰래 고향으로 들여오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같은 해 5월, 그는 정종호(鄭鍾浩)가 만든 예산농업고등학교 독서회 조직에 적극 찬동하고 활동하였으나 12월 정종호가 예산농고 독서회 사건으로 체포되고 조사가 확대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하여 1933년 1월, 출가(出家)하여 광복 때까지 선의(璇儀)라는 승명으로 은둔생활을 하였다. 형인 윤봉길이 서거한 지 60주년이 된 1992년, 윤남의는 사재를 출연해 일본 가나자와(金澤)에 윤봉길 의사 추모비(尹奉吉義士追慕碑)를 건립하였다. 현재는 고인의 추모활동에 감명받은 일본인들이 윤봉길의사현양회(尹奉吉義士顯揚會)를 만들어 추모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1996년에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